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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써주지 않은 제품을 만들고 나서야 배운 것들

실패한 나의 첫 제품을 떠올리며

by 플래터

실패한 첫 제품


기획자로서의 제 첫 번째 제품은 실패작입니다. 유명한 제품이나 서비스 혹은 유명세와 별개로 좋은 제품을 만든 PM에게는 사람들이 성공 비결이나 노하우를 묻곤 합니다. 하지만 몇 년 전 첫 이직을 위해 포트폴리오를 내민 제게 돌아온 질문은 조금 달랐습니다. “그건 왜 그렇게 했어요?” 혹은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죠?” 등. 자랑이 아닌 해명의 대상이 되는 첫 제품이라니. 이처럼 기획자 혹은 PM/PO로서의 제 첫 시작은 다소 씁쓸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첫 제품을 기획하던 때의 저는 고객도, 고객의 문제도 명확히 알지 못한 채 제품부터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만들고 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혹은 그저 상사나 다른 이해관계자의 요구사항을 수렴하기에 바빴던 것 같기도 하고요.


욕망의 집합체


알음알음 알고 있던 어느 선배 기획자 한 분이 어느 날 제게 들려준 말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고객 없이 제품을 만들다 보면, 제품이 아니라 욕망의 집합체를 만들게 돼요."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되던 무렵에도 기획은 곧잘 수정되고, 방향은 수시로 흔들리는 모습을 전해 듣고는 보다 못한 나머지 건넨 조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었을 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그래도 난 아닐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생각보다 빨리 현실이 되었습니다. 시장은 냉정했고, 사용자는 돌아서갔고, 저는 만든 제품을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타깃 고객이 누구인지, 고객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인지, 그래서 어떤 가치를 제공하며, 주요한 지표와 그 추이는 무엇인지 등은 하나도 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선배 기획자의 말처럼,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제품'이 아닌, 조직과 이해관계자의 욕망만 덕지덕지 붙어있는 '욕망의 집합체'가 되어있음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제품은 제 포트폴리오 어디에도 없습니다.


실패가 남긴 교훈


제품은 그렇게 제 손을 떠났습니다. 제품과 그걸 만든 제 스스로에게도 부족함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이직에 성공했거든요. 그러나 제품은 제 손을 떠났지만, 줄곧 제 머릿속에 남아있었습니다. 왜 실패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다시 한다면 무엇을 다르게 할지를 곱씹어보곤 했고, 이는 조금이나마 저를 성장시키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덕분일 겁니다. 지금도 강의나 멘토링, 강연 등에서 제 경험담을 이야기할 기회가 종종 생기곤 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제 첫 제품의 쓰디쓴 실패담은 꽤 유용한 소재거리가 되어줍니다. 성공담은 ‘참고’가 되지만, 실패담은 ‘경고’가 되니까요.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참고가 아닌 경고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예비 창업가를 위한 어느 특강에서 기획안의 컨셉을 듣고 의견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창업가분의 열정도,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도 가득 반영된 기획안이었지만 제품은 실제 사용자들이 겪는 문제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보다 정확히는 고객이 겪는 문제는 무엇인지, 그 문제가 제품을 통해 해결할만한 문제가 맞는지, 그래서 제품이 제공하는 핵심 가치는 무엇인지는 쏙 빠져있었습니다. 사용자의 실제 문제보다 창업자의 욕망이 더 도드라졌던 제품이었습니다.


제 실패담을 고스란히 말씀드렸습니다. “저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결국 남은 건 사용자가 아니라 저와 회사의 욕심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이론이나 개념, 프레임워크에서는 심드렁하던 분이 그제야 눈빛이 조금 바뀜을 목격했습니다. 아마도 그 뒤로 조금은 고객 중심으로 기획을 다시 정리하신 걸로 기억이 납니다.


결국, 실패가 무언가를 남긴다는 건 이런 순간에 실감이 납니다. 단순히 후회로 끝나지 않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거나, 다음 시도에서 방향을 틀 수 있게 해주는 재료가 될 때. 나의 실패가 누군가의 반면교사로서 노하우가 되어줄 때.


실패에서 배운 성장


글을 쓰고 강의나 강연, 멘토링을 하기 시작한 뒤로 자주 떠올리는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노하우라는 건 꼭 성공한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노하우는 '성공하는 법'을 알려주고, 또 어떤 노하우는 '이렇게 하면 실패한다'는 걸 알려줍니다. 생각해 보면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한 이에게는 후자의 노하우도 결코 작지 않습니다.


사수나 선배의 존재란 자신의 실패를 발판 삼아 후배가 더 나은 선택을 하게 도와주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역할을 해줄 사람이 없다면 직접 실패해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신, 빠르게 실행하고, 실패하고, 그 실패를 곱씹고, 그 안에서 배워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쌓인 경험은 언젠가 더 나은 선택을 위한 기준이 되어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패했던 과거는 언젠가, 오히려 누군가에게 자랑스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때 했던 잘못된 판단 하나하나가, 오늘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선택과 결정을 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성장은 성공에서만 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실패에서 배운 성장은 더 오래갑니다. 실패했지만 성장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그 실패는 어쩌면 가장 든든한 자산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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