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꼬 시창에서의 1박 2일 여행
조금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그동안 나는 '도마뱀의 출연 여부'에 따라 여행지를 결정했다. 때문에 식당, 숙소 구분할 것 없이 도마뱀이 일상이라는 발리 여행은 생각해본 적도 없고 동남아 국가로 여행을 갈 땐 호텔 사이트를 몇 번이고 검색하며 리뷰를 꼼꼼하게 확인했다(물론 도마뱀 여부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는 후기는 없었지만).
처음 방콕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도마뱀을 보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터미널21(아속역 근처 쇼핑몰)에 연결된 호텔에 5일간 머물렀다. 혼자 여행 치고 꽤 비싼 숙박비를 지불해야 했지만 도마뱀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토끼눈으로 밤을 지새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에서 태국 식당을 운영하는 정 셰프님께 꼬 시창(Kho Sichang, 'Kho'는 '섬'을 의미한다) 여행을 추천받았을 때도 도마뱀이 문제였다. 방콕에서 장기로 머물면서 도마뱀을 종종 목격했지만 우리 집에서 발견된 적은 없었다는 게 유일한 위로였다. 하지만 마땅히 호텔이라고 부를만한 곳이 없는 꼬 시창에서 도마뱀이 없는 안전한 숙소를 보장받기란 어려워 보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다가 결국 나는 숙소를 예약하지 않고 무작정 배낭을 꾸려 꼬 시창으로 향했다.
에까마이 역에서 미니 벤을 타고 2시간 반 정도를 이동, 시차라에서 또다시 50분 동안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듣던 대로 외국인 관광객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올망졸망 예쁜 집들이 모여 있는 풍경이 퍽 푸근했다. 나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정 셰프님이 추천한 Flower blue coffee(꼬 시창에서 유일하게 에어컨이 나오는 곳이다)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그 가게의 사장 촘푸 아주머니에게 정 셰프님의 프언(친구)이라고 하자 나를 무척이나 반겨줘서 낯선 곳에 왔다는 두려움이 조금은 잊혔다. 얼떨결에 그와 함께 기념사진까지 찍고 정 셰프님의 낚시 선생이었다는 까 아저씨의 툭툭을 대여해 3시간 동안 중국 사원, 팔레스를 비롯해 다양한 뷰 포인트를 둘러봤다. 그중 내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탐방 비치(Tamphang beach)였는데 드넓은 에매랄드 빛 바다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숙소도 아직 잡지 못해 짐이 한가득인 데다가 툭툭 대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찾아오기로 하고 그곳을 떠났다.
나는 이동하는 틈틈이 숙소를 검색했고 마침내 바다 전망의 한 리조트를 예약했다. 말이 리조트지 민박집 같은 곳이었다. 방 앞 복도에 붙어있던 도마뱀이 부디 문 틈새로 들어오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짐을 풀고 다시 나가 해가 질 때까지 꼬시창 골목골목을 둘러봤다. 강렬한 햇빛에 원색의 지붕들이 더욱 반짝일 때마다 나는 꼬 시창에 빠져들었다. 나는 공터에 모여 비석 치기나 볼링 같은 간단한 놀이를 즐기는 동네 사람들을 구경하고 할머니가 팟타이를 파는 동안 그 옆에서 조용히 바나나를 까먹던 꼬마와 눈인사를 나눴다.
해산물 요리가 일품이라는 빤 앤 데빗(Ban & David)에서 저녁 식사를 해결하고 숙소로 돌아와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다음날까지도 내 방에 도마뱀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여행이었지만 나는 탐방 비치에 가기 위해 이튿날 아침에 다시 까 아저씨를 만났다. 숙소에서 탐방 비치까지는 고개 하나를 넘어가야 하는데 잘 달리던 툭툭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러더니 까 아저씨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아뿔싸. 도마뱀이었다. ‘당장 이곳을 피해달라’ ‘왜 멈췄냐’ '나는 도마뱀을 정말 싫어한다' 등등 하고 싶은 말은 수만 개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찡쪽(도마뱀)’, ‘끌루-어(무섭다)’ 두 단어를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치는 일이 전부였다. 그동안 태국어 공부에 소홀했던 것이 후회될 때쯤 내 반응에 당황한듯한 까 아저씨가 급히 툭툭에 시동을 걸고 자리를 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내가 본 건 찡쪽이 아니라 ‘옌’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건 까 아저씨의 마지막 한마디였다. “옌은 정말 아름다운 동물이야.”
기대에 부풀어 도착한 탐방 비치는 새벽에 내린 비 때문인지 전날의 감성은 온데간데없고 검푸른 색의 거친 파도만 일렁이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한정 짓고 정의하고 판단했는지 반성하며 젖은 모래 위에 앉아 이른 아침부터 맥주를 마셨다. 그렇게 1시간 여가 흘렀을까. 까 아저씨의 툭툭을 기다리기 위해 벤치에 앉아 있는데 내 앞으로 찡쪽이 지나갔다. 당연히 움찔했지만 찡쪽 모양 머리핀을 차고 지나가던 소녀들과 그들의 가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찡쪽 인형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해결해야 할 망상들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