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하루에 세끼를 먹어야 하고, 사이사이 간식까지 먹는다.세 아이들. 나까지 4명의 식사를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해대다 보니 먹다가 하루가 끝이 나는 기분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는데, 그날이 오늘이다. 한 끼라도 자유롭고 싶어 아이들에게 컵라면을 사 와서 먹으라고 했다. 몇 번의 교육 끝에 뜨뜨미지끈한 정수기 85도의 물로 라면을 말다가- 한 아이가 라면을 쏟고 말았다. 식탁에 올려놓은 컵라면을 건드려 쏟아진 것이다.
라면 국물은 순식간에 식탁을 가로질러 사방으로 내달린다. 놀란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엄마의 불호령이 누구에게 떨어질 것인지 가슴을 졸인다. 범인 색출을 위해 나는 주방을 둘러보는데, 그러는 사이에 주황색 국물이 패브릭 의자에 주르륵주르륵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국물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하......"
이것이 얼마나 큰 대참사인지 아는 것은 첫째뿐. 덩달아 첫째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세 아이들은 손에 닿는 것들을 가져다가 황급히 닦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리고는 라면을 후루룩 먹어 치운 뒤 얼른 학원으로 도망가버렸다.
나는 얼룩덜룩한 식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어서 주황빛으로 물든 패브릭 의자를 바라본다. '저건 화장실로 가져가서 통째로 빨아야 되는데...'
사방팔방으로 흐른 라면 국물을 다 정리하고 겨울철 햇빛이 겨우 드는 창가에 잠시 앉았다. "나가야겠다!"
나는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비장하게 가방을 챙겨 나왔다. 10분 정도 걸어 사거리 모퉁이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오후 4시의 카페엔 웅성웅성 사람들이 많다.
라면 사건으로 점심도 거르고 나왔는데, 소금빵이며, 크로플이며, 크로와상까지 모두 품절이다... 먹는 것에 "대충"이란 것이 없는 나라서 화가 난다... 뭐라도 채워 넣어야 화가 줄어들 것 같아, 평소에 먹지도 않던 5,500원짜리 카스텔라를 집어 들고 HOT라테를 한잔 시켰다.
따뜻한 온풍기 위로 실링팬이 살살 살살~ 돌아가며 적당한 온도를 맞춰준다. "여기 센스 있네" 춥고 더운 것에 약한 나는 이런 배려가 참 좋다.
통창 앞 2인석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커피와 카스텔라가 예쁘게 담긴 테이블을 보니 금방 쏟아진 라면 따위를 잊어버리는데 도움이 되었다. 통창을 가린 하늘하늘한 커튼에 햇빛이 비집고 들어온다. 귀에 무선 이어폰을 집어넣는다(처음에는 유선이어폰처럼...튀어나온귓구멍이 위쪽으로 길쭉하게 나온 부분을 아래로 가게 끼우는 바람에 귀에서 자꾸 빠져서 남편이 놀리던 적이 있는데, 지금은 길쭉한 부분이 위쪽으로 오고 귓구멍에 넣는 돌출된 부분이 아래로 오도록 잘 끼우고 있다 사실 아직도 헷갈리긴 한다).
유튜브에 들어가 피아니스트 "임윤찬"을 검색한다. 평상시에 클래식을 즐겨 듣지는 않지만, 가끔씩은 목소리가 아닌 악기가 주는 편안함이 좋다. 일률적임에도 볼륨이나 터치에 따라 감정이 달라지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 사이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간다. 5시를 향해가니 퇴근이나 저녁을 준비하는 모양이다. 나를 말없이 위로해 주던 햇살도 어느새 등을 돌리고 얄미운 그늘이 되어, 통창 사이로 찬바람을 휑하니 들여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남편이 회식이 있는 날이다. 부부가 같이 쓰는 공유 캘린더에 쓰여 있어서 알았다. 남편은 회식하는 날이면 항상 새벽 1시가 넘어야 들어왔다.
'나도 아이들과 회식을 해야지!' 뭘 먹으면 좋을지 고민이 된다. 뭔가 즐겁게 떠들고, 신나는 분위기였으면 좋겠다. 치킨은 좀 자주 먹었고, 피자를 먹으면 소화가 안될 것 같은데... 두 끼 떡볶이에서 만찬을 벌일지, 기름기 자글자글한 삼겹살집을 갈지 아직 결정을 못했다. 평상시에는 먹고 싶어도 생활비 줄인다고 안 먹었는데, 왜 오늘 같은 날은 먹고 싶은 게 생각이 안 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