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감정이 싹트고 연애를 시작하는 순간, 서로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평소보다 외모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외모뿐만 아니라 말 한마디 행동거지도 조심한다.
상대가 좋아할 말과 행동을 빛의 속도로 계산하고 주저 없이 실행한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반응을 얻게 됐을 때의 만족감은 어떤 보상보다 달콤하다.
연애 초반의 긴장감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짧게는 3개월에서 6개월이 넘어가면서 점차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특히 여자보다 남자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남자들은 여자 친구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여자 친구에게서 남자 친구와 같은 편안함을 바라게 된다. 이미 그렇게 됐다고 착각하는 남자들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은 긴밀하고 편한 관계가 됐으니, 더 이상 내숭 떨지 말고 편하게 지내자는, 무언의 합의로 여긴다. 여자는 그런 그가 더 이상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녀는 3년째 연애 중인 30대 초반의 직장인이었다. 이십 대 후반에 그를 만나 불같은 연애가 뭔지 알게 됐다고 했다. 그만큼 뜨겁고 열정적인 커플이었다. 부산에서 대학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했던 그녀에게 남자 친구는 큰 힘이 됐다.
가끔 나를 찾아와 연애 초반처럼 뜨겁진 않지만 그래도 좋다며 너스레를 떨던 그녀의 얼굴에 고민이 가득했다.
"몸이 안 좋아 보여?"
"며칠 전부터 신경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 것 같아요."
"무슨 일 있었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거 같아..."
"솔직히 이 문제를 말할 사람도 없고, 어떻게 말할지도 모르겠고, 고민이 돼서요."
"대체 무슨 소리야? 말할 사람이 이렇게 앞에 앉아 있으니 편하게 말해봐! 너무 고민하지 말고."
"남자 친구 문제에요. 그런데 말하기가 좀 그래요."
"연애하다 보면 생각도 못한 문제도 생기는 거잖아. 맘에 담아두면 병 나.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해결하면 좋잖아?"
"휴~ 이런 문제를 상의하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어요."
"원래 모든 문제는 내 일이 되기 전까지 꿈에도 모르는 거야!"
"남자 친구와 사귄 지 벌써 3년이 넘었어요. 부산에서 서울로 올 때는 걱정이 많았어요. 가족과 친구들이 전부 부산에 있고 혼자 서울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어요. 그래서 연애를 시작한 건 아니었는데 운명처럼 그 사람과 만나게 됐죠. 남자 친구가 저에겐 든든한 버팀목이었어요. 제가 힘들 때마다 위로하고 따뜻하게 손 잡아준 사람이었으니까요. 이 사람이다 싶었죠. 지금도 그 마음이 변함없고요. 그런데 몇 달 전부터 문제가 생겼어요!"
"무슨 문제인데?"
"몇 달 전에 원룸으로 이사를 갔어요. 그전까지는 셰어하우스에서 여자들끼리 살았고요. 이사를 했던 건 남자 친구에 대한 배려였어요. 아무래도 여자들끼리 사는 공간은 좀 불편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게 문제의 시작이었어요. 그 남자가 그렇게 더러운 줄 몰랐어요."
"얼마나 더럽길래?"
"화장실 변기를 너무 지저분하게 써요. 타월도 제 멋대로 놓고요. 그전엔 안 그랬거든요. 갑자기 이사하고 나니까 모든 게 변했어요. 아무리 편해도 그렇지... 남자들은 다 그런 건가요?"
"다 그렇지는 않지... 그런데 그게 문제인 거야? 남자 친구가 너무 지저분한 거!"
"맞아요. 분명히 그 전엔 안 그랬는데... 새 집으로 이사 오고 함께 집에 있을 때는 잘 씻지도 않고 청소도 안 해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에요."
"청소도 돕고, 좀 씻으라고 말하지 그랬어?"
"말했어요. 좋게 말했어요. 좀 씻는 게 좋을 거 같다고. 그리고 설거지도 좀 도와 달라고."
"그런데 말을 안 들어?"
"그게 그때뿐이에요. 그 뒤에 똑같은 상황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단세포 동물로 변해요. 씻지도 않고 청소도 안 해서 화장실 변기도 제가 다 청소해요. 누워서 티브이 볼 때 코딱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후비고요. 더러워서 못 봐주겠어요."
"그 뒤로는 말해 본 적 없어?"
"못했어요. 제가 잔소리 같은 거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잔소리는 누구나 싫어하지. 그랬구나. 그것 때문에 계속 힘들었구나."
"그 사람은 이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태연한 거 겠죠?"
"그 정도로 이야기했다면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 같아."
"전 이런 문제로 힘들 게 될지 정말 몰랐어요. 전 보통 사람들이 다 깨끗한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연하게도요. 깨끗한 게 좋지요?"
"그럼 깨끗한 게 좋지!"
"그런데 왜 더럽게 쓰지요? 하다 못해 양말을 벗어도 뒤집어서 벗어요. 깨끗하게 빨리고 나중에 신기도 편하려면 똑바로 벗으면 되는 거잖아요!"
"네 말이 맞아. 네가 이상하거나 잘못된 건 없어."
"그렇죠. 전 제가 결벽증이라도 걸린 줄 알았어요."
"그렇다고 남자 친구 잘못도 아니야."
"그럼 아무도 잘못이 없네요. 그럼 제가 유별난 건가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남자 친구와 너랑 깨끗하고 느끼는 기준이 다르다는 뜻이야. 남자 친구가 네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걸 지저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야. 단지 기준이 다른 거야."
"왜 다르죠? 그 기준이 어디서 나온 거예요?"
"내가 맞는 거 같은데... 내 기준과 상식에 안 맞으니까... 화나지?"
"네 화나가요. 이럴 줄 알았으면 이사도 안 갔을 거예요. 서로 일 때문에 주말밖에 시간이 안 나요. 주말이라도 편하게 만나고 싶어서 이사를 한 건데... 더 불편해졌어요. 어쩌죠?"
"다르게 생각하는 걸 인정하기가 쉽지 않지?"
"솔직히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이해가 안 가요!"
"변했으면 좋겠지. 네가 좋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네 변했으면 좋겠어요. 좀 더 깨끗하게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싸우고 싶지도 않지?"
"맞아요. 이런 사소한 문제로 싸우게 되면 내가 미워질 거 같아요."
"그래서 더 스트레스받는 거야."
"스트레스도 안 받고 남자 친구와도 안 싸울 방법이 없나요?"
"우선은 남자 친구에게 네가 이렇게 스트레스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해. 지금까지 정확하게 인지를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가볍게 알려주는 게 좋겠어요. 단 확실하게!"
"어떻게요?"
"화장실 벽면 세탁기 그리고 싱크대에 메모를 적어놔. 너무 과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소극적이지도 않게. 물론 메모를 붙여 놓기 전에 지금까지의 이런 마음이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그럼 솔직하게 전부 다 말해요. 화났던 것 까지요?"
"너무 솔직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 상대가 지금까지 그 문제로 힘들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으니 그걸 인지하는 정도로 가볍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종이에 메모를 남기건 나중을 대비하기 위해서야."
"나중을 위한 대비요?"
"한 번 이야기한다고 해서 원하는 만큼 바뀌긴 쉽지 않을 거야. 그래도 상황이 변한 걸 인지할 거야. 네가 이걸 싫어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겠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 거야. 그렇게 잊어버렸을 때 기억을 되돌리는 용도로 메모가 필요해."
"그 말은 당장 변하지 않을 걸 전제로 하는 거네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잖아.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다만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고 배워가는 거지. 뭐든 시작이 중요하잖아. 나중에 싸울 때 싸우더라도 정확하게 이유를 알고 싸우면 문제가 비교적 가벼워지니까. 남자 친구가 메모를 무시하고 네가 싫어하는 행동을 계속한다면 그때는 시원하게 속에 있던 말을 해도 상관없어. 그때는 남자 친구도 본인의 잘못을 인지할 테니까. 네가 스트레스받는 이유도 알 거고. 그때 행동하는 걸 보고 남자 친구와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 판단해 보면 돼."
"오래 만나고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시간이 지날수록 더 어렵죠. 이렇게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요!"
"오래 만났다고 그 사람을 다 알 순 없으니까. 애정을 갖고 평생을 지켜봐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게 사람이잖아. 그래서 내가 좋을 대로 생각하고 기대하는 거야. 나만의 착각이지. 그래서 사소한 문제에도 실망이 큰 거고."
"그럼 저도 그 사람을 제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본 거네요. 좋은 모습만 있기를 바랐던 건 사실이에요. 그 남자 좀 더러운 것 빼면 아주 좋은 사람이긴 해요. 이번 기회에 깨끗한 사람으로 변했으면 좋겠어요."
"처음부터 너무 기대는 하지 말고!"
"그래도 기대하고 싶네요!"
남자는 여자에게 남자처럼 생각하고 반응하기를 기대하고, 여자 역시 마찬가지이기에, 세상에 오해로 인한 사고와 문제들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남녀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드디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마르코 폰 뮌히하우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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