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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곶사슴 Jun 12. 2019

점을 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퇴사 후에 오는 것들 #21

많이 의지하던 여자 친구와 헤어져 힘들어하던 친구는 사주부터 시작해서 신점, 타로, 카드점 등등 종류별로 참 다양한 점들을 보고 다녔다. 점을 본 적도 없고 당시 연애도 해 본 적 없던 나는 친구의 행동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점을 본다고 그녀가 돌아오는 것은 아닐 텐데. 니가 아니라면 아닌 걸 텐데 말이다.


첫 직장에서 난생처음 후배라고 만났던 친구도 비슷했다. 삶이 조금 힘들어지면 각종 점을 보러 다닌단다. 자기 팔자가 조금 개판인 건지, 관상이 험해서 그런 건지 좋은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 드물다고 했다. 그렇게 사나운 팔자 치고는 지금은 꿈꾸던 직장에 들어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아 보이긴 한다만...


그 직장에서 퇴사를 다짐하고 남미행 티켓까지 샀으나 아직 퇴사 통보는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설 연휴라 모처럼 사람들이 일찍 퇴근했으나 나와 후배는 별 시답잖은 이유로 남아서 야근을 하게 되었다. 


어찌어찌 일을 마무리하고 나오니, 연휴 직전의 거리에는 사람이 1도 없었고 간단하게 저녁을 먹을만한 곳도 보이지 않았다. 버스 정거장 근처의 떡볶이 집에서 떡볶이를 집어먹으면서 후배와 대화하다가 갑자기 우울해졌다. 


다른 친구들은 명절이라고 회사에서 상여금도 나오고 연휴에 휴가까지 붙여 써서 해외여행을 간다고 자랑하는데 나는 그 긴 연휴 동안 단 하루 쉬고 내일모레부터 다시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적은 월급과 과도한 업무를 꿈으로 포장하기엔 광고는 내 꿈도 아니었고 당시에는 퇴사까지 다짐한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조차 도망치고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고 내 팔자야'소리를 하다가

그 길로 사주를 보러 갔다.

의식의 흐름으로 꾸며낸 이야기 같지만 정말 그랬다.


연휴의 시작점, 늦은 시간에 마땅히 문을 연 집을 찾기도 힘들어 길거리에 있는 사주 카페에 들어갔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카누 정도의 믹스커피를 탄 것 같은 밍숭맹숭한 커피를 시키고 앉아 있으니 사주를 봐주는 사람이 등장했다.


나는 외로운 팔자라고 했다. 사주를 정리하면 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섬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오가기는 하지만 정착하는 사람은 없단다. 그리고는 연애운 이야기를 하는데, 여자가 없다고 했다. 부정적인 의미로 그쪽이 사납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뭐 이야기를 만들 요소가 보이지 않는단다.


글자 그대로 '없다'고.

이제 와서 보니 참 용한 사람이었다.

농담 따먹기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안면식도 없는 사람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주고 그 이야기에 맞춰서 나를 돌아보는 경험이 꽤 재미있었다. 점이라는 것은 나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위해 보는 걸까.


그 후로도 힘들거나 심심할 때,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사주를 보러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은 조금이라도 나아지거나 풀리지 않고 심각하게 꼬여갈 뿐이었다. X월에 여자를 만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진짜 연락하는 사람이 생겼네... 그런데 잘 되지는 않았네... 내가 그렇지 뭐... 딱 그 정도의 신뢰도. 돌아서 생각해 보면 '맞다. 그때 이런 이야기 했었지.' 정도 생각하고 넘어가는 정도의 신뢰도.


퇴사 후에, 심각하게 우울증을 앓고 있는 와중에도 시간이 흘러 새해가 밝았으니 사주를 보러 갔다.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내가 겪고 있는 우울증의 이유를 해결할 수 있는 묘수가, 어쩌면 미신에서 나올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주에 물이 있네, 나오신 학교가 K대처럼 큰 호수가 있다거나 강가에 있었나 봐요."


띠용


아무 데나 보이는 곳에 들어갔는데 뜬금없이 학교를 맞춰서 신뢰도가 급상승했다. 그런데 그 후로 해 준 말들이 너무 상투적이었다. 작년까지 팔자가 꽉 막혀있었는데 올해부터 풀릴 팔자다. 안정적인 일을 하는 것이 좋다. 4월쯤에 물을 한 번 건너가야 하니 제주도라도 다녀오라는 둥 평소에 나한테 관심 없다가 면담 시즌이 되어서 억지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선생님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나오면서 같이 들어갔던 친구들과 이야기해보니 사실 어지간해선 학교마다 호수나 연못 정도는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정말 얻어걸린 것이라고 봐야 했다. 결국 듣기 좋은 말만 들려주는 타입의 점쟁이었던 모양이다. 사실 대부분의 점이라는 것이 그렇다. 두루뭉슬하게 이야기하면 듣고 있는 사람이 그 의미를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대화가 진행된다.


그런데 평소 사회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듣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계속 점을 보러 다니는 이유가 성립된다. 누구든지 물을 가까이하고 비행기 한 번 타는 것으로 복이 들어올 것이라고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사는 일에 아주 작은 기대라도 생겨나지 않을까. 적어도 현실의 제정신인 주변 사람이 이런 낙관적인 이야기를 해주기는 힘드니까.


결국 나도 점을 통해서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듣고 싶은 말 좀 들어보자고 아무 점집이나 들어가고 본 것이었다.


회사 생활을 할 때에도 '듣고 싶은 말 타령'은 계속된다. 직장상사들은 자신들은 절대 안 해주면서 우리에게 듣고 싶은 말을 해주길 참 강요한다. 그게 눈에 빤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베알이 꼴려서 끝내 해주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은 정치싸움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을 테다. 그런 말을 잘하는 것도 능력이다.


가끔은 점쟁이의 공허한 말보다, 아랫사람의 계산에서 나오는 말 보다 진심이 담긴 '듣고 싶은 말'이 듣고 싶다. 결국 내가 먼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실제로 잘하는 짓이 있어야 그런 말도 듣게 되겠지만.


아무튼 기껏 보러 간 사주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점을 보러 가는 이유를 파악했으니 나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말을 해 주고자 거울 앞에 섰다.


우울증은 더 커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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