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조기 교육 마케팅은 어떻게 성공했는가?
'영어 교육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말은 사교육이 지금까지 해온 가장 큰 거짓말 중 하나이다. 하지만 1달에 150만 원, 3년에 5천만 원이 넘는 영어 유치원이 해마다 급증하고 있고, 조기 교육을 넘어 태교 영어까지 있으니 나름 그 논리는 시장에서 통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조기 영어 교육이 마케팅의 핵심 화두가 된 데에는, 그곳에 고객의 니즈가 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영어 스트레스 좀 받아 본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이 말에 끌리는 것도 당연한지 모르겠다. 수십 년간 영어를 했는 데도 말 한 마디 못했던, 스스로의 문제 의식으로부터 찾은 나름의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영어가 초등 교육 과정에 정규 과목으로 도입된 것은 1997년 7차 교육 과정부터이다. 모국어를 완벽히 습득하지 않은 유아의 경우 외국어 학습 효과가 떨어진다는 학계 의견을 반영하여 초등 3학년부터 시작되었다.
바로 그 세대가 이제 부모 세대가 되었다. 지난 23년간 그들의 영어 실력은 어떻게 변해 왔을까? 영어를 잘하게 되어 그것을 업으로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력에 비해 영어 실력이 크게 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마음 깊은 곳에 현 영어 교육 체계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가득찼다. 가장 큰 문제 의식 두 가지를 뽑으라면 다음을 들 수 있다.
1. 문법 위주의 공부 방식 때문에, 정작 영어의 본질인 의사소통 실력이 늘지 않았다.
2. 학창 시절 영어 공부가 지긋지긋했다. 우리 아이에게 만큼은 영어가 즐거웠으면 좋겠다.
위 두 가지 문제 의식은 자연스럽게 두 가지 해결책으로 이어졌다.
1. 문법보다는 영어에 대한 노출량을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
2. 어릴 때부터 영어에 친숙해 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여기에 이론적 근거가 붙어 조기 영어 교육 시장이 열렸다. 우리가 모국어를 자연스럽게 배우는 바로 그 시기에 영어를 얼마나 많이 접하는가가 평생 영어 실력을 좌우한다는 이른바 결정적 시기 가설이다. 그런데 이 가설이 정말 사실일까? 만약 '결정적 시기가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조금이라도 영어 공부가 늦은 아이들은 그냥 포기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우선 유아 영어 교육 시장에서 내세우는 논리를 살펴보겠다. 언어를 배우기 위한 이론과 가설은 많은 학자로부터 무수히 많이 나왔는데 그중에서도 노엄 촘스키(Noam Chomsky)가 자주 언급된다. 그는 구조 언어학을 주류로 하는 미국 언어학계에 새바람을 불어 넣은 '언어학 혁신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이다.
그의 이론 중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언급되는 것이 언어습득장치(Language Acquisition Device)와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이다. 언어습득장치(LAD)란 우리 머릿속에 하드웨어와 같은 장치를 말한다. 이것은 나이가 들면 작동이 어려워지므로, 어릴때의 언어 학습이 효과적이고 이상적이라고 가정한다. 이 가정에 따라 나오는 것이 결정적 시기이다. 쉽게 말해 어렸을 때를 지난 청소년이나 어른은 학습의 결정적 시기를 지났기 때문에 제2언어(Second Language)를 습득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이 내용은 60~70년대 이야기다. 60년대까지 주류를 이루었던 구조 언어학과 비교했을 때 매우 혁신적인 이론(1957년 발표)이었고, 이 이론과 함께 발표된 여러 가지 가설과 이론이 90년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90년대 이후로는 빅데이터를 통한 수많은 반박 사례와 연구 등이 등장하여 결정적 시기 가설은 말 그대로 가설로 남게 되었다.
더욱이 '결정적 시기'라는 용어는 사람이 아닌 동물학에서 가져온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도 결정적 시기인지 민감한 시기(Sensitive Period)인지 논란이 있다. 또한 오늘날의 뇌 연구에서 밝혀진 것처럼 뇌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나이와 상관없이 발전할 수 있는 기관(뇌가소성)이다. 아이와 동물에게 결정적 시기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긴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한낱 가설에 불가한 그것도 50년째 가설(hypothesis)로 남아 있는 이 주장은 한국에 들어와 다음과 같이 하나의 사실로서 받아들여진다.
영어를 배울 때에도 어느 특정한 시기가 있어서 우리 아이가 그 특정한 시기에 영어를 배우지 못하면 영어를 못 배우거나, 배우더라도 힘들게 배울 것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매우 섬뜩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불안 마케팅이 부모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영어 조기 교육에 적극 동참하지 않던 부모일지라도 아이가 6~7세 정도가 되면 슬슬 불안해진다. 자꾸만 내 아이만 뒤떨어 지는 것 같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자신이 마치 책임감 없는 부모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아이의 삶에 혹시나 천추의 한을 남기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까지 찾아 온다. 그래서 결국 일반 유치원보다 훨신 비싼 영어 유치원에 보내게 된다.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투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가설은 가설일 뿐이다. 언어학의 권위자가 노엄 촘스키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이론이 다 맞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그의 제자인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언어의 맥락과 화자의 체험을 강조하는 <인지 언어학>을 만들어 스승과 대립적 논리를 펼쳤다. 지금은 민주주의 정치평론가로 더 유명한 노학자 노엄 촘스키가 청년 때 주장한 이론 하나를 가지고 영어 조기 교육 시장 전체를 뒷받침하기에는 논리가 너무 빈약하다.
이제 이 논리가 가진 헛점과 함께, 최근 정론으로 인정받는 학설을 살펴보자.
최근의 연구 결과를 보면 결정적 시기 가설과 반대되는 사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 학습의 속도가 오히려 더욱 빨라진다는 연구 결과다. 이는 뇌 발달은 나이와 상관이 없다는 뇌가소성 이론과 함께 최근 교육계의 트렌드가 되었다. 조지타운대학 언어학과의 교수 앨리슨 매키(Alison McKe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을 빨리 배우면 배울수록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을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아이들은 인지적으로 더 성숙했기 때문에 언어 학습의 속도가 더욱 빠른 것도 사실입니다.
어릴 때 발음을 더 잘 배운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한국의 부모에게 영어 조기 교육이 로망이 된 이유는 자녀의 발음이 원어민과 같아질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제임스 플레게, 캐나다)는 꼭 그렇지는 않다는 걸 보여준다. 평균적으로 5살에 이민을 가 30년간 캐나다에 산 연구 대상자들을 조사한 결과 '어릴 때 배운다고 발음을 더 잘 배우는 것은 아니다. 영어 노출 빈도와 강도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발음에 있어 나이가 주된 변수는 아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서울대학교 영어 교육과 이병민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유치원 단계에서 1~2년 영어에 노출되었다고 해서 이 아이가 나중에 어떤 영어 발음을 갖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영유아 시기 잠깐의 영어 경험과 노출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물론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영어 유치원이라는 개념이 도입된 지도 20년 이상 흘러, 영어 유치원 1세대가 이제는 대학생이 되었다. 세계화, 국제화를 외치며 OECD에 가입한 지도 20년이 흘렀다. 그러나 OECD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영어 구사 능력은 20년째 큰 변동 없이 아프리카 우간다보다 낮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대한민국 영어 교육의 비경제성이다. 특히 그중 금액적으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영유아 대상의 영어 교육 시장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그래도 영어 유치원에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자면, 어릴 때부터 공부하는 것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들이는 시간과 비용에 비해 너무나도 효과가 미약한 매우 비경제적인 투자라고 답하고 싶다. 너무 어릴 때부터 학습을 강요받은 아이는 영어 학습에서도 무기력해질 가능성이 크다. 다음은 노엄 촘스키가 좀 더 최근에 국내 언론사와 인터뷰한 내용이다.
최근에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는 태아 영어 학습법이 성행하고 있다. 언어 학자로서 외국어 학습 시기에 대해 조언하면, 일반적으로 결정적인 시기에 인지와 지각 능력이 활성화되기는 하지만 모든 인간은 하늘의 최대 선물인 신비로운 언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언어 능력은 어떠한 최첨단 컴퓨터도 따라가지 못하는 특별한 능력이다. 모든 인간은 이 최고의 능력을 갖고 있다. 동기와 환경을 만들어 주기만 하면 언어 능력은 저절로 작동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에서 영어를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동기와 환경이라는 연료를 끊임없이 공급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기는 9~10세가 효과적이지 않을까 한다. - 노엄 촘스키, 『신동아』, 5월호, 2007
영어권 나이에 9~10세는 초등학교 3, 4학년 정도다. 이 시기는 성인처럼 이미 우리말이 완전히 자리잡은 나이다. 이때가 가장 좋다는 말은 영어를 배우는 시기가 좀 늦어도 영어를 제대로 배우는 데 지장이 없다는 의미와도 같다. 영어 교육에는 결정적 시기가 있어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한다. 이런 전문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어린 나이에 영어 공부를 시작하지 않고, 심지어 40세가 넘어 외국어 공부를 시작한 사람도 해당 외국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가능해진 사례는 얼마든지 쉽게 찾을 수 있다.
조기 교육보다는 초등학교 3학년 이후 적기 교육이 정답이다. 보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영어 습득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imhoSOX378I&t=110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