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여왕 etc...
박지은-김희원 콤비의 새 드라마 '눈물의 여왕'이 연일 화제다. 사실 극적 재미라는 측면을 볼 때 시청자에게 이 작품은 나무랄 데가 없다. 당장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넷플릭스로 다시보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런데 회차가 거듭될수록 느껴지는 묘한 찜찜함을 떨칠 수 없는 이유는 왜일까?
드라마 속 다크 히어로 주인공 중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인물은 2007년 하얀거탑의 장준혁이다. 그런데 일본판 원작을 먼저 본 나로서는 두 나라의 정서 차이를 가장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하얀거탑은 1950~60년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가 야마자키 토요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이 소설에서 부잣집 데릴사위 자이젠(한국판 장준혁)은 말 그대로 욕망의 화신으로 그려진다. 의사로서의 소명감이 전혀 없는건 아니지만 여러모로 냉혹한 면이 부각되는 편임.
하지만 한국판 드라마 속 장준혁은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술에 취해 고뇌하며 넋두리를 하는 등 나름 인간적인 모습을 자주 보인다. 마지막회에서 죽어가는 장준혁을 보며, 그가 저지른 과오와는 관계없이 눈물을 쏟는 시청자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개천의 용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온정적인 시선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까지 아들이 국회의원 아버지의 지역구를 세습받는 일본과는 확연히 다른 정서다. 이처럼 '온도차'가 어느 정도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 드라마의 매우 치명적인 공통점 하나가 걸린다. 바로 '악에 받힌 흙수저 빌런'이라는 클리셰....
'눈물의 여왕'속 모슬희는 남의 신분을 도용하면서까지 재벌가에 입성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견제를 받았음에도 본인의 의도를 꾸역꾸역 감춰가며 무려 30년을 버텼다. 아직 드라마에서 본격적인 서사가 펼쳐지진 않았지만 단순히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라고 보기엔 동기가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아마도 퀸즈 일가와 모종의 악연이 있었던거 같지만 어쨌든 뇌피셜은 보류한다 치고, 윤은성이 악행을 이어가는 이유는 비교적 확실하다. 엄마의 부재와 불우했던 유년기다. 비싼 개를 다치게 했다며 어린 윤은성과 홍해인을 질책하던 산지기 부부는, 다칠 뻔한 홍해인이 재별손녀라는 사실을 알자 한순간에 뒤집힌다. 이 모습을 보며 느꼈을 윤은성의 박탈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드라마 속 장치들이 자칫 '없는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심화시킬 가능성을 나는 배제하기 어렵다. 생명을 거리낌없이 살해한 윤은성의 행동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지만, 산지기 부부가 개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려던 이유도 결국은 '귀한몸'이어서라는 언급이 있다.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여유가 없는 사람일수록 남을 챙기기보단 자신을 보호하기에 급급한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일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와중에도 주변을 돌볼 줄 아는 의인들도 분명 존재하고, 가진 것이 엄청남에도 베풀 줄 모르는 수전노들을 우리는 꽤 자주 볼 수 있다. 결론은...스테레오 타입을 충실히 따른 이야기는 그저 재미로만 소비하는 게 좋을 뿐, 현실과 구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