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2세의 생애와 식성
군주제를 아직까지 유지하는 나라들을 보면 “우리나라 왕족들은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국권 침탈이라는 흑역사 탓이 가장 크겠지만, 헌법이 엄연히 존재하는 국가에서 형식적 국가원수인 국왕이 자리보전하는 모양새가 여러모로 어색한 것은 사실이다. 사우디나 브루나이처럼 직접 ‘통치’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오늘날의 왕족들은 그 명맥을 잃지 않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무려 한 세기를 살다 2022년 서거한 엘리자베스 여왕 역시 그 고군분투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1926년 4월 21일 영국 런던 메이페어에서 출생한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는 원래 왕위 계승과 거리가 있는 방계 혈족이었다. 아버지인 요크 공작 앨버트는 조지 5세 국왕의 차남이었고, 왕위 계승 서열 1위 에드워드 왕세자가 아직 미혼이었기 때문. 조지 5세의 첫 손주였던 엘리자베스는 ‘릴리벳’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왕실의 귀염둥이로 자라났다. 비교적 평범하게 살 수 있었던 그녀의 인생이 바뀐 것은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가 갑작스럽게 왕좌를 내려오면서부터다.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인 베시 월리스 심슨과 결혼하기 위해 에드워드는 왕위를 포기했고, 동생 앨버트 공작이 조지 6세로 즉위한다. 후세 사람들은 “사랑을 위해 왕관을 포기한 로맨티스트”로 에드워드를 평가하기도 했지만, 막상 그의 뒤를 잇게 된 조지 6세의 스트레스는 극심했다. 말더듬이에 소심한 성격이었던 새 국왕은 대국민 연설을 앞두고 쩔쩔 맸는데, 그가 두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은 콜린 퍼스 주연 영화 ‘킹스 스피치’에 잘 묘사돼 있다. 엘리자베스는 원치도 않는 왕관을 쓰고 마음고생한 부친이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를 원망했다고 전해진다.
1937년 조지 6세가 즉위하면서 엘리자베스는 왕위계승 서열 1위가 됐다. 그리고 18세 때 영국 여군부대에서 군복무를 수행하며 왕위 계승자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 맡은 임무는 보급차량을 운전하고 정비를 하는 일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때의 참전 이력이 국민의 신뢰를 얻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1947년 21세 생일을 맞은 엘리자베스는 “위대한 제국의 국민들을 섬기는데 제 일생을 바칠 것”이라고 밝혔다.
아프리카 케냐 방문 중 부친의 부고를 들은 그녀는 1952년, 25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정치에 개입할 일은 없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영향력을 조국을 위해 쓰기 위해 노력했다. 대표적인 예가 6개월에 걸친 영연방 국가 순방이다. 제국주의 영국의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즉위 25년인 1977년, 영연방 35개국 지도자들이 축하 연회에 방문하는 등 과거 식민지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갔다. 왕실 면세 특권을 폐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고 사망 이틀 전까지 공식일정 수행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다만 국민과 친근해지기 위해 왕실 다큐멘터리를 찍는 등 사생활을 공개한 일은 결과적으로 독이 되고 말았다. 자녀들은 황색언론의 표적으로 전락했고, 큰며느리 다이애나는 불행한 결혼생활 끝에 파파라치에 쫓기다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당시 아들의 불륜을 제때 바로잡지 못한 엘리자베스의 처신은 큰 비난의 대상이 됐다. 아들, 며느리로도 모자라 손주며느리 케이트 미들턴, 둘째 손주 해리 부부까지 가십에 휩싸였다.
어린 시절 엘리자베스는 가정교사에게 “시골에서 말을 키우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 남편 필립 공과 몰타에서 보낸 신혼기간이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도 했다. 여왕이라는 화려한 이미지와 달리 그녀는 일상에서도 소박한 생활을 유지한 듯 하다. 1982년부터 1993년까지 여왕의 전속 요리사였던 대런 맥그래디는 “여왕은 먹는 것을 크게 즐기진 않는다”고 밝혔다. 아침에 얼그레이 티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했는데, 설탕이나 우유는 넣지 않았으며 약간의 비스킷을 곁들였다. 오전 8시경 시리얼과 과일로 조식을 먹었고, ‘Special K’가 여왕의 최애 브랜드였다.
점심 때는 구운 생선과 야채를 즐겨 먹었는데 시금치와 호박 등을 곁들인 ‘도버 솔’을 자주 먹었다고 한다. 가자미, 서대와 비슷한 생선으로 잉글랜드 남부 도버 해협에서 많이 잡혔지만 지금은 남획으로 보기 힘들어졌다. 바닷속 모래바닥에 서식하며 비린내 없이 은은한 흰살생선 특유의 풍미를 갖고 있다. 향과 맛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간단하게 조리하는데 버터를 바른 석쇠에서 노릇하게 구워내는 ‘뮤니엘’이 대표적이다. 유럽에서는 아몬드 파우더나 청포도 소스를 올리기도 한다.
영국여왕답게 오후 시간에는 ‘하이 티’를 마셨다. 샌드위치와 스콘, 디저트를 곁들인 애프터는 티 세트가 여왕의 간식인 셈이다. 저녁이 되면 고기 위주의 저녁을 먹었다. 양고기와 로스트 비프, 야생 조류인 뇌조 등을 좋아했다고 한다. 마늘을 싫어해 음식에는 일절 넣지 않았고 빵과 파스타, 감자 같은 탄수화물은 극도로 제한했다. 대신 여행을 다닐 때 반드시 초콜릿을 챙길 정도로 단 음식을 사랑했으며, 궁전 곳곳에 캐슈넛 같은 견과류를 비치해 수시로 먹었다고. 생선과 견과류 등 몸에 좋은 지방을 자주 섭취하고 소식한 것이 장수의 비결로 꼽힌다.
의외로 반주도 즐겼다. 이는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도 마찬가지였다. 여왕의 음주는 오전부터 시작됐는데, 점심 직전에 레몬과 얼음을 곁들인 진과 듀보네 칵테일을 마셨다. 점심 때는 와인 한잔, 밤에는 드라이 마티니, 잠들기 전 프랑스산 샴페인을 마시는 게 루틴이었다. 다만 과음은 절대 하지 않았고 건강이 악화되자 마티니는 중단했다.
한국에서 특별한 생일상을 받은 일화도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1999년 방한한 여왕은 이화여자대학교, 인사동 거리를 둘러본 후 안동 하회마을을 찾았다. 한옥에 들어설 때 여왕이 한국의 관습을 존중해 신발을 벗자 외신기자들은 일제히 플래시를 터뜨렸다. 서양에서는 맨발을 드러내는 일이 금기시되는 탓인데 이런 모습에 한국 기자들이 어리둥절해 했다고. 방문 기간 동안 73회 생일을 맞은 여왕을 위해 인간문화재 조옥화 여사가 특별히 상을 차렸다.
조선시대 궁중음식을 바탕으로 과일, 국수, 편육, 찜, 탕 등 47가지 음식이 상에 올랐다. 차리는 데만 꼬박 사흘이 걸린 생일상의 하이라이트는 매화나무 가지에 갖가지 꽃과 과일, 토끼와 나비 같은 색색의 떡으로 장식한 꽃떡 화분이다. 영국 대사관에서는 생일상을 사양했지만 안동시에서 “귀한 손님의 생일을 그냥 지나치는 건 양반 고을의 법도가 아니다”라며 설득했다고 한다. 당시 안동의 사과와 배를 맛본 여왕은 그 맛에 반해 매년 영국으로 공수해 갔고, 특별히 여왕에게 진상할 품종까지 개발됐다.
최근 영국에서는 안동에서 여왕이 받았던 생일상을 재현하는 행사도 열렸다. 그만큼 여왕을 그리워하는 국민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왕실의 권위 추락은 그녀 혼자의 힘으로 막아낼 수 없는 것이었고, 시대 변화에 따라 영국인들도 언젠가는 왕실을 폐지할지 모른다. 하지만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에 평생 충실해 온 엘리자베스 2세는 세월이 지나도 존경받는 군주로 남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