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암스트롱과 케이준 요리
“예술은 고통을 먹고 피어난다”는 인식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존재하는 것 같다. 샹송 가수 에디뜨 피아프는 연인을 잃은 아픔을 노래 속에 녹여냈고, 어느 소리꾼 아버지는 딸의 목소리에 한을 심어주기 위해 눈을 멀게 만들기까지 한다. 고향에서 머나먼 땅으로 끌려와 비참하게 살아야 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음악도 지독한 고통을 자양분 삼아 탄생했다.
가난과 백인들의 멸시가 일상이던 20세기 초, 흑인들의 삶은 과거 노예로 지낼 때보다 별반 나을 게 없었다. 특히 이 시기 태어나 재즈음악의 대부로 성장하는 한 소년의 인생사는 불우하다는 단어 하나로 설명이 부족할 정도다. 1901년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난 루이 암스트롱은 낳자마자 아버지에게서 버림받는다. 부친이 처자를 버리고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어머니 메이앤은 루이와 여동생을 양육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성매매로 돈을 벌어야 했다.
가난과 비참한 현실 속에서 루이는 공부보다 생계에 매달려야 했고 품팔이 일로도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잔반통을 뒤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13살때는 몰래 훔쳐온 권총을 발사했다가 소년원에 송치됐다. 그의 삶에 작은 빛이 되어준 존재는 음악이었다. 루이는 11살 때 돈을 벌기 위해 친구들과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뉴올리언스에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재즈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영향을 줬고, 한 유대인 일가의 도움으로 손에 넣을 수 있었던 낡은 코넷을 독학하며 루이는 음악가의 꿈을 키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소년원에서 찾아왔다. 교화를 위해 음악을 가르치던 교사 피터 데이비스가 그의 재능을 알아본 것. 루이는 소년원 밴드의 리더가 됐고, 출소 후 길거리와 댄스홀을 떠돌며 코넷을 연주했다. 이때 그는 벙크 존슨, 버디 프티 같은 음악가들과 함께 공연할 수 있었고 강력한 후원자인 킹 올리버도 만나게 됐다.
미시시피 강을 오가는 증기선에서 밴드 활동을 하던 루이는 점차 프로 뮤지션의 면모를 갖췄고, 초창기 재즈 성지 스토리빌 항구가 폐쇄되자 1922년 올리버를 따라 시카고로 이주했다. 이미 시카고에서 기반을 잡고 있던 올리버는 자신이 이끌던 '크리올 재즈 밴드'에 루이를 차석 코네티스트로 영입하게 된다. 그러나 아내 릴 하딘은 올리버 밴드가 쇠퇴 기로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부부는 플레처 핸더슨의 초청을 받아 다시 뉴욕으로 떠났다. 트럼펫으로 포지션을 옮긴 루이는 곧 밴드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헨더슨 외에 같은 고향 출신 피아니스트 클레런스 윌리엄스, 클라리넷과 소프라노색소폰 연주자 시드니 베쳇과도 협업했다. 베시 스미스 같은 블루스 가수들과도 공연을 같이했다.
1925년 시카고로 돌아온 루이는 본인이 리더로 나서 '루이 암스트롱과 핫 파이브'를 결성했다. 이때 그 유명한 ‘스캣’도 첫 등장했다. ‘Heebie Jeebies’ 라는 곡을 녹음할 때 루이는 아무 의미 없는 즉흥 가사를 흥얼거렸고, 이는 오늘날까지 대중음악의 보컬 기법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음악적으로 성장을 거듭한 루이는 점점 유명인사가 됐고, 미국이 대공황을 겪을 때도 유럽 순회공연을 통해 글로벌 스타의 지위를 얻는 데 이른다. 2차대전 후인 1949년에는 재즈 뮤지션 최초로 타임지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루이 암스트롱은 한국과도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1963년 그랜드 워커힐 호텔이 개관했을 때 그는 한국을 방문해 2주를 머물며 공연을 가졌다. 갓을 쓰고 장죽을 문 사진이 당시 대한뉴스를 통해 공개됐으며, ‘여러분’으로 유명한 가수 윤복희의 재능을 알아보고 미국으로 올 것을 권한 것도 그였다.
재즈음악을 논할 때 ‘소울’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겪어온 애환이 음악에 녹아든 것처럼 ‘소울푸드’는 이들의 몸과 마음에 자양분이 되어 준 고향음식을 가리킨다. 소울푸드라는 단어가 요즘은 마음에 안식을 주는 음식이라는 뜻으로 확대됐지만, 원래는 미국 남부에서 유래한 프라이드치킨, 옥수수, 돼지곱창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소울푸드는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루이 암스트롱이 태어나고 자란 뉴올리언스의 소울푸드는 정확히 말하면 흑인들만의 고유 식문화라기보다 백인, 미 원주민, 흑인 등 다양한 인종들이 뒤섞여 살아온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뉴올리언스 요리의 근본은 프랑스계 이민자들로부터 시작됐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루이지애나 주에는 지금도 그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다. 뉴올리언스라는 지명부터가 Nouvelle-Orléans, 즉 ‘새로운 오를레앙’이라는 뜻이다.
피트, 야드 단위를 사용하는 미국 내 다른 주들과 달리 루이지애나에서는 미터법이 일반적이다. 매년 2월에는 사순절을 앞두고 마르디 그라 축제가 열린다. 프랑스식 도넛 ‘베녜’는 루이지애나의 명물 간식이다. 루이지애나 요리는 상류층이 주로 먹던 ‘크리올’과 서민요리 ‘케이준’ 두 부류로 나뉜다. 생크림과 생굴 등 고급 재료를 사용한 크리올에 비해 케이준 요리에는 돼지기름과 강하고 자극적인 양념이 쓰인다. 캐나다 아카디아에서 강제 이주해온 프랑스계 이민자 케이준들은 좋은 식재료를 구할 여유가 없어 나름의 조리법을 개발한다.
이들은 소수민족들의 주식이던 쌀, 옥수수, 돼지고기 등을 주로 먹었다. 비싼 버터 대신 돼지기름인 라드를 사용했고 더운 날씨에 음식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카이옌 페퍼, 마늘, 후추 같은 향신료에 샐러리, 양파, 소시지 등을 듬뿍 넣었다. 이들 재료는 강한 양념으로 질이 다소 떨어지는 고기나 해물의 잡내를 가려주는 역할도 했다. 케이준 요리는 멕시코, 흑인, 스페인계 이민자들의 식문화도 적극 받아들였다.
루이 암스트롱이 즐겨 먹었다는 고향음식으로는 ‘더티라이스’가 있다. 흑인 문화의 영향이 강한 이 요리는 백인들이 버린 닭이나 돼지의 내장에 쌀과 콩, 팥 같은 잡곡을 섞어 끓인 것이다. 노예들이 먹던 꿀꿀이 죽에 가까웠으나 케이준 양념이 더해지면서 풍미가 더해졌다. 잠발라야 역시 쌀을 주재료로 한 뉴올리언스 대표요리이다. 프랑스 앙두이 소시지에 돼지고기나 새우 등을 넣고 피망과 샐러리, 토마토, 양파, 마늘 같은 향미야채를 첨가한다. 이런 재료들을 쌀과 함께 볶다가 육수를 부어 익히는 방식이 스페인식 빠에야와 비슷하다.
걸쭉한 스튜 검보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로 꼽힌다. 밀가루를 기름에 볶은 루에 고기, 햄, 갑각류, 각종 채소를 넣어 푹 끓인다. 사사프라스 잎을 말린 필레 파우더나 아프리카 원산 채소 오크라를 넣어 점성을 더한다. ‘검보’라고도 불리는 오크라는 길쭉한 풋고추처럼 생겼는데 매운맛은 전혀 없으며 자르면 끈적한 진액이 나온다. 한국인들에게는 이런 식감이 불호에 가깝다보니 미국 남부식 레스토랑에서도 내놓는 곳이 많지 않다. 반면 날달걀, 낫토, 마즙처럼 끈적거리는 음식을 즐기는 일본인들은 오크라를 밥과 함께 일상적으로 먹는다.
뉴올리언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해산물로는 가재의 일종인 크로피시를 빼놓을 수 없다. 크로피시에는 재미있는 전설도 전해져 내려온다. 케이준 사람들의 고향 아카디아 해안에는 커다란 랍스터가 많았다고 한다. 랍스터들은 영국에 의해 강제이주하는 사람들을 따라 허물을 벗으며 따라왔고, 그 결과 작은 크로피시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중국식 마라롱샤와 비슷한 크로피시는 옥수수, 감자, 소시지 등과 함께 케이준 양념에 끓여 옥수수빵을 곁들여 먹는다. 살을 발라먹기 힘든 게 단점이지만 뉴올리언스 여행 때 반드시 맛봐야 할 별미 중 하나다. 랍스터와 게, 새우 등을 쪄낸 시푸드 보일도 있는데 푸짐한 해산물에 매콤짭짤한 양념이 한국인들의 입맛에도 잘 맞는다.
한편 디즈니 애니메이션 ‘공주와 개구리’에는 재즈를 사랑하는 악어 ‘루이스’가 등장한다. 트럼펫으로 멋지게 연주하는 그는 바로 루이 암스트롱을 모델로 한 캐릭터다. 음악만큼이나 식탐도 많았던 루이는 편지를 쓸 때도 “Red beans and ricely yours”로 끝을 맺었고 Cornet Chop Suey, Cheesecake 같은 음식 이름을 노래 제목으로 삼기도 했다. 대스타가 된 후에도 소탈함을 잃지 않았던 그의 면모는 소박하면서도 친근한 케이준 요리의 맛과도 비슷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