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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Sep 07. 2024

맛과 위트로 풀어낸 냉전시대 서사

작가&통역사 요네하라 마리

모스크바 붉은 광장

“소련이 죽었다”

1991년 전 세계 신문들은 이런 헤드라인 문구로 냉전 시대의 종식을 알렸다. 소비에트 공화국이 러시아와 14개 독립 국가로 해체되고, 동유럽 각국에서는 공산주의 정권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러시아 사람들이 빵을 구하기 위해 줄을 선 모습은 책으로만 사회주의에 대해 알고 있던 우리나라 국민에게도 여러모로 충격과 생소함을 안겨줬다.     


이 엄청난 변혁의 시기, 한 동양인 여성이 구 공산국가들을 오가며 받은 인상들을 글로 남겼다. 그녀가 주목한 부분은 이념이라는 거대 담론이나 세계 질서의 재편 같은 정치적인 면과는 거리가 있었다. 변화 앞에 선 다양한 사람들의 면면을 조목조목 관찰하고 담아냈는데, 그 주된 키워드는 인류 공통의 사소하다면 사소한 관심사인 ‘음식’이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일본의 동시통역사이면서 작가로 활동한 요네하라 마리다.     


생전의 요네하라 마리

1950년 도쿄에서 출생한 요네하라 마리의 삶은 그 시작점부터가 범상치 않다. 부유한 지주 집안 아들이었던 부친 요네하라 이타루는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당시 일본 사회의 주류를 거스르는 급진적 사고를 가졌다. 공산당 활동에 투신하면서 일본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마리의 할아버지와 친척들은 “제발 공산주의자의 삶을 포기하라”며 읍소했고 재산을 미리 상속하기까지 했지만 이타루는 물려받은 재물과 땅을 전부 공산당에 헌납했다고 한다.     


다만 요네하라 마리 일가가 이 때문에 가난에 시달리거나 핍박을 당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 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지역 유지로서의 굳건한 입지 덕분이다. 더구나 2차대전 종료 후 일본에서는 공산당 활동이 합법화됐다. 요네하라 이타루는 더 이상 범법자처럼 숨어 살 필요가 없었을뿐더러 고향에서 중의원을 여러 차례 지내며 승승장구했다. 이런 환경에서 마리는 유복한 유년시절을 지냈고, 공산당 간부인 아버지를 따라 당시로서는 아무나 방문할 수 없었던 동구권 국가에서 장기간 체류했다.     


9살 때인 1959년 마리의 부모와 3살 아래 여동생 등 일가족은 체코슬로바키아(현 체코공화국) 수도인 프라하로 이주한다. 아버지 이타루가 국제 공산주의 정당 간의 협력조직인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 대표로 파견된 것이다. 마리와 여동생 유리는 프라하에 있는 소비에트 학교에 입학했고, 일본인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공산국가의 교육을 받고 성장하게 됐다. 당시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은 소련의 영향 아래 있는 위성국과 같았고, 소비에트 학교도 교과 과정이나 학사 등 모든 면에서 소련의 통제를 받는 곳이었다.     


'여행자의 아침식사'

동급생들은 대부분 공산국가 외교관이나 고위직, 다시 말해 냉전시절 ‘공산 귀족’이라고 불리던 노멘클라투라 자녀들이었다. 그에 비해 요네하라 일가는 일본 정계에서도 소수 중 소수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공산당원 집안에 불과했다. 9살 소녀가 이런 복잡한 사정을 제대로 알았을 리는 없으나, “만민이 평등하다”고 외치는 공산국가 출신 친구들이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호화생활을 누리는 모습은 꽤나 이질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어쨌든 그녀의 특수한 경험이 글로 쓰이고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계기는 90년대 전후로 시작된 냉전의 종식이었다.     


일본에서 대학을 마치고 러시아어 동시통역사로 일하던 요네하라 마리는 20~30년 만에 다시 어린 시절을 보낸 구소련과 프라하 등을 찾게 된다. 세상이 변했음을 이야기하는 소재로 그녀는 소비에트 공화국 시절의 ‘통조림’을 선택해 글로 풀어냈다. 구소련 식료품점에는 ‘여행자의 아침식사’라는 통조림이 있었다. 쇠고기나 돼지고기, 생선 등을 주재료로 채소를 다져 넣고 육수로 굳힌 것인데 비주얼이 흡사 반려동물용 습식 사료와 비슷했던 모양이다. 마리는 이 음식을 ‘금욕적 사회주의자의 미의식’이라고 표현했다. 미식을 죄악시하던 그 시절의 또 다른 메뉴로는 토마토와 삶은 다시마가 있었다. 둘 다 하루 정도 굶고 극도로 배고플 때 먹으면 먹을만한 맛이라고. 이 맛없는 통조림은 공산정권이 무너지면서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보드카와 캐비아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원소 주기율표를 고안한 러시아 화학자 멘델레예프는 “보드카를 마실 때 이상적인 도수는 40도”라고 했다. 알코올이 가장 잘 흡수되고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도 적으며 최상의 맛을 내는 황금비율을 제시한 것. 이런 표준까지 제시된 것은 그만큼 보드카가 러시아에서 갖는 국민주로서의 위치가 확고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러시아인의 보드카 사랑을 두고 요네하라 마리는 “빵이 없으면 일을 못하고, 보드카가 없으면 춤을 못 춘다”는 속담을 언급한다. 참고로 개혁개방을 주도한 고르바초프가 실각한 주된 원인이 금주령 발효였다고.      


보드카와 캐비아

공산정권 붕괴가 러시아 특산물 캐비아에 미친 나비효과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구소련 시절에는 철갑상어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에서 남획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생산 과정 전반을 통제했다. 청어 통조림에 캐비아를 숨기고 서구에 수출, 비자금을 챙긴 비리 사건까지 있었다. 하지만 소련이 무너지면서 아제르바이잔 등 캐비아 주생산지인 흑해 연안 독립국들이 외화벌이를 위해 어획량을 대폭 늘렸다. 실제로 철갑상어 개체수 감소 우려가 커진 것은 이 무렵의 일이다. 원래 캐비아 채취는 철갑상어 한 마리에서 단 한번만 가능했는데 제왕절개(?)로 여러 번 캐비아를 얻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마리는 여기에 일본의 발명품인 YKK 지퍼가 쓰였다는 농담도 덧붙였다. (실제로는 절개 부위가 자연스럽게 붙는다고 한다.)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동유럽, 특히 러시아와 체코의 음식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낯설지만 소박한 현지의 식생활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농사를 짓기 힘든 척박한 땅에서 감자의 전파는 그야말로 구원의 작물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낯선 농작물인 감자가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각 나라의 군주들은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며 감자를 국민들에게 보급했다. 오늘날 더 이상 감자를 거부하는 이들은 없으며, 너무나 일상적인 음식이 된 탓에 “사랑은 감자처럼 창밖에 던져버릴 수 있는게 아니다”라는 속담까지 등장한다.      


프라하 소비에트 학교에서 마리는 무려 하루 6끼의 식사를 했다고 말했다. 등교하기 전 아침식사를 하고, 오전 10시경 쉬는 시간에 오픈 샌드위치 혹은 잼과 소시지를 곁들인 흑빵을 홍차, 코코아 등과 먹는다. 점심은 오후 2시에 나오는데 절인 정어리·청어를 양파 등에 버무린 전채요리와 보르시 같은 여러 가지 수프, 메인요리를 먹는다. 메인 메뉴의 구성은 고기와 탄수화물이 기본으로 스테이크에 감자튀김을 곁들이거나 로스트치킨을 곁들인 버터라이스 등이 나온다. 후식은 과일을 사용한 디저트 종류를 주로 먹었는데 체리를 넣은 젤리가 특히 맛있었다고 작가는 회고했다. 학생들은 귀가 후 집에서 다시 간식, 저녁, 야식을 먹는다.     

러시아 전통 음식들

다만 거의 매끼마다 채소를 먹어야 하는 일본인에게 이곳의 야채는 종류도 적고 부실했다. 그나마 추운 곳에서도 잘 자라는 당근과 양배추, 무 등이 구하기 쉬웠고 많지 않은 채소의 보존성을 높인 피클 종류가 다양했다고 한다. 마리 가족은 제한된 재료로 일본음식을 재현해 보려고 애썼는데 빵가루와 맥주로 누카즈케(겨된장 채소절임)를 만드는가 하면 미생물학자인 친척에게 낫토균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고 한다. 일본쌀과 비슷한 북한 쌀을 구해다 먹거나 이웃의 한국인으로부터 양배추 김치를 얻어 먹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학교에서 모국의 동화를 하나씩 들려주는 시간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주먹밥 데구르르’를 떠올리는 바람에 먹고 싶어서 괴로웠다는 구절을 보면 ‘밥’에 대한 작가의 진심이 절실히 느껴진다.     


핀란드를 배경으로 한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의 주인공은 “주먹밥은 일본인의 소울 푸드”라고 하는데 이는 절대 과장이 아닌 듯하다. 마리는 가쓰오부시만 넣은 것도 좋으니 주먹밥 하나가 간절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신선한 회를 구할 수 없는 시베리아에 상상으로 초밥을 먹는 놀이를 하며 마음속 허기를 달랜다. 그녀는 “고향에서 뻗어나온 가장 질긴 끈은 위(胃)에 닿아있다”는 말로 본인의 음식철학을 요약한다.      

일본식 주먹밥

그 외에도 요네하라 마리의 저서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외국 동화 속 음식들이 등장한다.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집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프스의 하이디가 사랑한 염소젖 맛이 기대와는 달랐다거나 호랑이 버터의 정체는 인도식 ‘기’였다거나 하는 해설이 덧붙여졌다. 에리히 캐스트너의 동화에 언급되는 ‘터키꿀엿’을 궁금해하다 러시아 할바를 맛보고 감동했던 사연, 이와 비슷한 스페인의 폴보론, 같은 터키식 과자인 로쿰의 맛을 탐색하는 과정을 보면 일종의 집요함마저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작가로서 요네하라 마리의 독창성은 보통 사람이 겪기 힘든 체험만이 아니라, 상상력과 자유로운 사고의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요네하라 마리의 여동생 유리는 이탈리아 요리사로, 작가인 이노우에 히사시와 결혼했다. 그는 평화헌법 개정에 반대하고 식민지배를 공식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유명한 진보 지식인이다. 히사시는 ‘억압적 제국주의에 저항한 한중일 3국의 작가’로 한국의 김산, 중국의 루쉰, 장인인 요네하라 이타루를 소개한 바 있다. 안타깝게도 요네하라 마리 본인은 한창 글을 쓸 수 있는 56세의 나이로 일찍 별세했다. 그녀가 더 장수했다면 세계 정세에 대해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위트와 자유로움이 넘치는 글들을 많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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