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먼로, 오해와 진실
“나는 마릴린이 아니라 재클린이 필요해”
영화 ‘금발이 너무해’의 주인공 엘 우즈는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하는 남친에게 이런 대사로 이별을 통보받는다. 1950년대를 풍미한 섹시스타 마릴린 먼로는 이처럼 ‘멍청한 금발미녀’라는 영미권의 클리셰를 고착시킨 장본인이다. 하지만 그녀의 실제 캐릭터는 오히려 강한 자존감과 지성을 갖춘 ‘뇌섹녀’에 가까웠다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체적인 여성의 삶은 순탄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마릴린 역시 예외가 아니다. 1926년 LA에서 노마 진, 훗날의 마릴린은 정신질환을 겪은 어머니에게서 친부가 명확하지 않은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결혼, 이혼을 반복하고 가정폭력 피해까지 당했던 어머니 글래디스는 두 번째 남편 마틴 모텐과 사는 동안 직장 상사와 내연관계에 있었다. (훗날 유전자 검사를 통해 내연남 찰스 기포드가 친부로 밝혀졌다.) 조현병과 편집증에 시달리는 생모와 불안한 가정환경 탓에 어린 마릴린은 남의 집을 전전하며 성장했다.
그녀는 고작 8살 때 자신을 맡아준 어머니 친구의 남편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하는 등 고된 유년기를 보냈다. 한 위탁 가정에서는 마릴린이 집에 들어오지 말라며 영화관에 하루종일 있도록 방치했을 정도.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극장에서 본 화려한 세상은 그녀가 배우라는 꿈을 가지는 계기가 됐다. 어려운 환경 속에 간신히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위탁가정이 다른 주로 떠나면서 마릴린은 학교 선배였던 항공사 정비공 제임스 도허티와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고아원에 가지 않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남편이 전쟁터로 떠나자 마릴린은 방위산업체에서 근무하다 인생의 변곡점을 맞았다. 군부대 사진작가인 데이비드 코노버는 1944년 마릴린이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됐고, 핀업걸 촬영을 제안했다. 캘린더 누드모델로 서게 된 그녀는 정식으로 모델 에이전시에 등록하고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다. 갈색에 가까웠던 머리색을 옅은 금발로 염색했고 시대의 아이콘이 된 금발미녀 마릴린 먼로가 이때 탄생했다. 잡지 모델로 활발하게 활동하다 배우 오디션에도 도전했는데 20세기 폭스에서 수습기간 중 연기와 노래, 춤을 배웠다.
연예계 활동을 반대하는 남편과 이혼하고 영화, 뮤지컬에서 단역을 맡는 등 어려운 무명시절을 거치던 마릴린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50년 영화 ‘이브의 모든 것’과 ‘아스팔트 정글’에 출연하면서부터다. 섹시한 매력과 백치미로 인기를 끌다 누드사진 스캔들이 터졌지만 파산 직전의 생활고로 인해 어쩔 수 없었다고 당당히 밝히면서 상황을 반전시킨다. 관능적인 이미지에 ‘먼로 워킹’이라고 불리는 특유의 걸음걸이, 나른한 목소리로 남자들을 매혹시킨 마릴린. 하지만 그녀는 제임스 조임스의 ‘율리시즈’를 읽을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섹시스타로 소비되기보다 연기로 인정받기 원했다.
당시 헐리우드의 시스템은 마릴린 뿐 아니라 대다수의 여배우들에게 족쇄와도 같은 것이었다. 끊임없이 성적인 어필을 강요하는가 하면 대스타가 된 후에도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 주지 않았다. ‘오즈의 마법사’ 주연배우 주디 갈란드가 어린 나이에 무리한 촬영을 감행하고 성접대에 불려가던 시절이었다. 이 가운데 마릴린은 여배우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직접 엔터테인먼트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멸시받던 흑인들을 동등한 존재로 존중하고 반핵운동을 지지하는 등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적극적 행보를 이어갔다.
이런 당당한 내면과 대조적으로 마릴린의 개인사는 그야말로 파란의 연속이었다. 배우로 성공한 후 맞은 두 번째 남편 조 디마지오와는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이혼했다. 1954년 결혼식을 올리고 두 사람은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떠났고, 마침 한국전쟁으로 주둔하던 미군들의 위문공연을 부탁받는다. 마릴린은 남편을 두고 홀로 서울 여의도비행장을 통해 입국, 인제와 동두천, 대구 등지에서 순회공연을 가졌다. 화려하게 주목받는 아내의 모습에 막 선수생활에서 은퇴한 디마지오는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가부장적인 이탈리아계 이민자였던 그는 무자비한 폭행을 가한 가정폭력범이기도 했다. 디마지오와 이혼 후 만난 극작가 아서 밀러 역시 작품 속에서 마릴린을 ‘백치미 금발미녀’로 묘사하면서 멀어지게 된다.
거듭되는 불행에 좌절한 그녀는 술과 약물에 빠져들었다. 대형 영화사와의 소송전, 당시 대통령이던 존 F. 케네디와의 스캔들까지 터지면서 마릴린의 삶은 나락으로 치달았다. 결국 1962년 8월, 전 세계를 풍미한 섹시스타는 36년의 짧은 인생을 마감하고 자신의 침대에서 알몸의 시체로 발견됐다. 오늘날까지도 그녀의 돌연한 죽음은 호사가들 사이에서 수많은 음모론과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어쩌면 마릴린 먼로를 죽게 한 것은 여성을 성상품화하는 세상과 무자비한 대중일지도 모르겠다. 주체성과 자존감을 지닌 인간으로 살아내고자 했던 그녀의 소망은 마치 샴페인 속 거품처럼 허망하게 꺼져 버렸다.
비록 사망 후 60여년이나 지났지만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마릴린 먼로의 매력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유효하다. 가장 화려하게 빛나던 시절의 먼로가 사랑한 아이템으로는 샤넬 No.5 향수와 파이퍼 하이직 샴페인이 대표적이다. 피부가 예민했던 그녀는 향수만을 뿌린 채 알몸 수면을 했다고 한다. 통풍을 원활하게 하는 풍욕은 자연치유요법 중 하나로 꼽히며, 심지어 조선시대 궁녀들도 미용을 위해 알몸으로 잠자리에 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먼로는 ‘산소를 마시듯’ 샴페인을 즐겼다. 생전에 그녀는 파이퍼 하이직 샴페인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무려 350병의 샴페인을 욕조에 부어 목욕을 즐기는 사치를 누리기도 했다. 술목욕은 기혈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주며 모공 속의 때를 녹여준다고 알려졌다. 청주를 빚을 때 나오는 술지게미는 일본에서 미용 재료로 인기가 높은데, 양조장에서 일하는 주조사들의 손이 유독 곱고 깨끗한 데서 착안해 제품화됐다. 술을 입욕제로 사용하는 문화는 전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로의 ‘최애’ 파이퍼 하이직은 프랑스 고급 브랜드로 무려 2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있다. 1785년 플로렌스 루이 하이직에 의해 상품화됐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즐겨 마시면서 럭셔리 샴페인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피노 누아, 샤르도네, 피노 뮈니에 등의 포도를 주재료로 사용한다. ‘여왕의 샴페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파이퍼 하이직은 섬세한 과일향에 부드러운 맛이 특징이다. 청사과, 배, 레몬 같은 상큼한 과일향을 기본으로 장미향, 딸기, 체리, 복숭아 등의 부케를 갖고 있다. 신선한 꽃과 과일이 혼합된 듯, 우아하고도 복합적인 향으로 특히 여성들이 좋아한다. 생선회나 해산물과 궁합이 맞으며 칸 영화제 공식 샴페인이기도 하다.
샴페인 외에 칵테일을 즐기기도 했는데 드라이 마티니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마티니는 무색투명한 진을 베이스로 이탈리아의 주정강화 와인인 베르무트를 첨가한다. 베르무트는 포도주 주정에 쑥과 용담, 키니네 등을 넣어 만들며 쌉쌀한 맛이 특징이다. 올리브로 장식하는 마티니는 ‘007’ 시리즈 제임스 본드의 칵테일로도 유명하다. 영화 ‘7년만의 외출’에서 먼로는 “마티니에 설탕을 넣어주세요”라고 하는데 이는 실언이었지만 바텐더는 “그래, 그러는 게 좋겠지”라고 비위를 맞춘다. 먼로의 방한을 기념해 웨스틴조선 바텐더가 개발한 ‘마릴린 먼로’라는 칵테일도 있는데 보드카에 붉은 캄파리를 더하고 우유 거품을 얹어 설탕을 묻힌 잔에 서빙한다. (참고로 이 칵테일은 2012년 창사 100주년을 기념해 선보였으며 지금도 웨스틴조선에서 맛볼 수 있다.)
달달한 디저트, 그 중에서도 특히 핫 퍼지 선데가 먼로의 최애 후식이었다. 소프트 캔디의 일종인 퍼지는 설탕, 우유, 버터가 주재료로 식감이 부드럽고 이에 붙지 않는다. 햄버거 프랜차이즈 ‘맥도날드’ 디저트이기도 한 선데는 쉽게 말해 미국식 파르페라고 할 수 있다. 유래는 19세기 말 일리노이주로 알려졌는데, 안식일에는 알코올이 함유된 소다나 아이스크림을 팔 수 없다보니 대신 과일이나 초코시럽을 올린 디저트가 인기를 얻었다. Sunday에서 Sundae로 표기가 바뀐 이유는 해당 지역 감리교인들의 항의 때문이라고.
생전의 마릴린 먼로는 식단을 관리하면서도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면 굳이 엄격하게 금지하지는 않았던 듯 하다. 아침에는 날달걀 두 개를 따뜻한 우유와 함께 마셨다고 한다. 점심은 건너뛰는 대신 저녁에 스테이크를 즐겼다. 쇠고기와 양고기를 특히 선호했는데 다이어트가 필요할 때는 고기 양을 줄이고 당근을 먹기도 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저탄고지’ 식단인 셈이다. 과식을 자제하되 먹는 것 자체의 즐거움은 포기하지 않았던 먼로의 식단은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삶의 태도와도 비슷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