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롭게 문제를 다루는 법에 대해
리처드파인만이 “나는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다. 나는 문제를 느낄 따름이다.”라고 말했어요.
문제를 푼다는 것은 초등학교부터 사지선다나 수학 문제를 푸는 거예요. 그럼 우리 브레인은 문제를 푸는 건 대부분 답이 있는 경우고 선형 논리를 동원해요. 기억했던 거 탁탁 불러서 논리적으로 끼워 맞춰서 답을 맞히는 거예요. 그래서 문제를 푼다 그래요. 문제를 풀 때는 우리의 논리적 기억이나 아주 좁은 범위에 집중을 하게 돼요. 직접적 관련된 재료만 갖고 답에 접근하는 거예요.
근데 문제를 느낀다는 말은 뭐겠어요? 단순히 푼다는 거 이상으로 그 전체, 한 문제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즉시 답이 있는 문제가 있지만 대부분 우리 삶에서 만나는 문제는 좋은 친구를 만난다든지 사람 성격을 바꾼다든지 이런 거는 오래 걸리는 문제들이잖아요. 이런 거는 안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문제를 풀고 나면 갈증이 해소돼버리잖아요. 놓아버려요. 놓으니까 잊어버려요. 그런데 문제를 느낀 사람은 품게 돼요. 문제를. 그 문제의 주변 분위기까지도 다 한 덩어리로 보는 거예요. 단순한 알아야 되는 하나가 아니고 그 문제가 출현했던 그 배경까지도 다 보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리죠. 오랜 시간 동안 문제를 잡고 있어야죠.
그래서 누가 성공할 것 같아요?
누가 궁극적으로 더 멀리 갈 것 같아요?
문제를 푸는 사람이 아니고 문제를 느끼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그 문제하고 자기가 한 몸이 돼 있는 거예요. 문제가 결코 자기 몸을 떠나지 않아요.
우리가 문제를 푼다 했을 때는 우리가 동원하는 게 직접적이고 선형적이고 가까이 있는 것만 가지고 굉장히 몰입을 많이 해요. 느낌은 내가 존재하는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이에요. 전방적으로 나를 덮쳐오는 거예요. 상황에 따라서는 확 덮쳐올 때 ‘전율’한다고 그러죠. 서서히 봄비 젖듯이 서서히 젖어오는 것도 있어요. 속도가 천차만별이에요. 공통점은 한 방향이 아니고 전방향적으로 나의 생존 공간 전체를 느낌이 장악하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숨 쉬는 공기처럼, 내가 한순간도 느낌이 없는 세계에서는 생존할 수가 없어요.
<박문호 박사, 유튜브 ’책과삶‘ 채널 중에서>
우리가 삶에서 맞닥뜨리는 대부분의 문제는 ‘화씨 36도가 섭씨로 몇 도 인가?’같이 명확한 답이 있는 구조화된 문제가 아니라 ‘학생에게는 체벌이 필요한가?’,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에 대한 병역 특혜는 반드시 필요한가?’와 같이 답이 모호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각기 다른 답을 제시할 수 있는 비구조화된 문제들이다.
삶에서 경험하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문제를 푼다는 태도보다는 문제를 느낀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삶에서의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관계에서의 갈등을 해결했다고 그다음부터는 갈등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고, 특정한 위법 행위를 해결할 수 있는 제도와 구조를 마련했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그 행위가 근절되었다고 이야기하긴 어렵다.
문제를 풀었다고 생각하면 그 문제를 놓아버리고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오히려 문제를 풀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문제를 품은 상태에서 바라보면 서로 각각 떨어져서 관련 없어 보이는 이슈와 현상들이 서로 연결되어 한 덩어리로 보이기도 한다. 이럴 때, 내가 품고 있던 문제는 하나의 스토리로 재구성되어 더 입체적으로 조명되고 해석된다.
문제를 느낀 상태에서 현상을 또 다른 스토리와 서사로 재구성하여 내 마음에 품게 되면 이전보다 ’ 여유’가 생긴다. 문제가 나와 분절되어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와 마음의 공간을 채우고 있고, 보다 여러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문제와 관련된 질문을 했을 때, 그것이 어떠한 질문이든 내가 구성해 놓은 서사와 세계관 - 또 다른 말로는 ‘생각의 저수지’라고도 할 수 있는 - 안에서 정답이 아닌 나만의 ‘현답’을 꺼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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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있었던, 늘 성실함과 세심함, 완벽주의를 추구하며 결과물을 만드느라 애쓰는 고마운 팀원과의 대화를 회고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