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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영 Oct 20. 2017

짧은픽션 : 이별한 날 쓴 시

 “언젠가 서점에서 당신 시집을 만나길 기대할게.” 여자는 남자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를 사랑했던 여자는 그의 시가 더 이상 설레지 않았다. 남자는 카페 창밖을 내다보았다. 출근길 지하철역으로 바삐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머리가 많이 자랐구나, 생각했다. 불과 며칠 전 머리 길이가 애매하지 않냐며 다시 자를까 고민하던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자는 오늘이 회사 창업 기념 휴무일이라 출근하지 않았다. 느지막이 일어나 혼자 백화점에 갈 생각이었다. 이제 날씨가 꽤 쌀쌀해지기도 했고, 애매한 머리 길이를 두고 며칠째 투정하는 여자를 위해 머플러를 하나 살 계획이었다. 외출할 때 어느 정도 가릴 수 있지 않겠나 싶었다. 남자는 머리를 그렇게까지 길러 본 적 없어, 머플러가 제 역할을 해줄지 말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선물이 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 머리 길이를 두고 얘기를 나눴던 날. 심드렁한 남자의 태도에 여자가 짜증을 냈고, 결국 둘은 다퉜었다. 집에 가는 길에 남자는 유독 다정한 커플들 모습을 많이 봤다. 그는 저 사람들도 우리만큼 자주 다툴까, 궁금했다. 그날 저녁 이후로 둘은 아무 연락이 없었다. 유통기한이 짧은 식품을 제조하는 회사를 다니는 남자는 창업기념 휴무일과 연이어 붙는 꽤 긴 연휴를 대비해, 남은 재고를 처리하러 다니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연락할 틈?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나중에 늘 그렇듯 어영부영 화해하게 되면, ‘왜 그렇게 연락이 없었어? 먼저 사과하면 덧나냐?’ 핀잔을 줄 여자에게 회사가, 이런 일이, 바빠서, 변명할 거리가 충분하다고 안심했다.

 그리고 오늘 여자는 남자를 대뜸 불러냈다. 아침부터 급히 온 전화였다. 기상 알람인 줄 알고 한 번은 잠결에 끊어버렸었다. 다시 울린 전화를 받고 나온 카페에는 평소처럼 깔끔하게 출근 준비를 마친 여자가 먼저 도착해있었다. 최근에- 우리 사이가- 띄엄띄엄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그리도 아득히 들렸던 날은 처음 만난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모 출판사에서 진행한 시 공모전에서 여자를 처음 만났다. 남자는 1등을 수상했고, 여자는 2등이었다. 시상을 하고 나면, 각자의 시를 낭독하는 순서가 있었다. 그때 여자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제목은… 제목은 뭐였더라… 남자는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만, 띄엄띄엄 자신의 시를 낭독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꿈꾸는 것처럼 아득하게 들렸다는 기억만 남아있다. 참 좋은 시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심사위원이었다면 1등을 줬을 텐데.


 여자는 그날 이후로 시를 쓰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의 시를 사랑하게 된 후로, 남자 같은 사람이 시를 쓰는 거고, 자기는 취미로 남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몇 번을 얘기했었다. 수상 당시 출판을 권유받았던 남자는 이후로 몇 편의 시를 더 써 내려갔다. 제법 시집으로 묶일 양만큼 썼을 때는 출판을 권유했던 출판사가 망해버린 뒤였다. 그 시들을 들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봤지만 시들이 너무 가볍다는 이유로 책으로 묶이진 못했다. 가벼운 시들에 대한 고민에 여자는 나랑 만나는 게 행복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웃으며 위로해줬다. 남자는 따라 웃었다.

 -내 말 듣고 있어?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은행에서 자기 번호가 불린 사람처럼 퍼뜩, 어! 하고 대답했다. 여자는 언젠가- 서점에서- 당신의 시집을- 하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남자는 문득 자신의 소박한 꿈이 싫어졌다. 시집이 나와 서점 어딘가에 자리 잡고 그녀가 그 시집을 발견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여자는 그걸로 남자의 근황을 옅게나마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 쓴 시가 몇 개 있다면, 남자의 최근 마음들을 좀 더 소상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여자는 거의 모든 메타포를 읽어낼 것이다. 여자는 이 세상에서 남자의 시를 가장 많이 본 사람이었고, 남자의 마음의 흐름에 따라 크고 작게 변하는 단어의 선택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남자는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읽어가는 동안 남자는 저 여자가 결혼을 했는지,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는지, 감기는 걸리지 않았는지, 남자가 몸에 안 좋다고 그렇게 자제하라고 한 콜라는 여전히 많이 마시는지, 사이가 좋지 않던 직장 동료와는 잘 지내고 있는 건지, 가족끼리 꼭 오로라 여행을 가겠다는 꿈은 이루었는지, 아무것도 모를 텐데. 여자의 머리가 얼마큼 길었는지도, 또 못 견디고 잘라냈는지도 모를 텐데.

한참 멍하니 있던 남자는 핸드폰 메모장을 열었다. 출근길에 이별을 통보한 여자가 어떤 마음이었을까를 두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백화점을 가지 않아도 되었으니(머플러는 꼭 사주고 싶었는데), 아침부터 이렇게 분위기 좋은 카페에 왔으니. 그 마음을 헤아릴 시간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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