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쓸채은 Apr 03. 2024

내 아이는 보리일까, 무순일까?

늘 엄마~ 하며 달려오며 하교하던 아이가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한 손에는 보조가방, 한 손에는 요상한 컵을 하나 들고 있다.


늘 아기 같은 목소리로 요구사항을 전하던 아이가 엄숙하고 진지하게 말한다.


"엄마, 집에 바로 가야 돼."


"왜?"


"이게 보리랑 무순이거든. 얘들이 일요일이면 싹이 난대."


학교에서 보리랑 무순 씨앗을 심었나 보다.

들고 있던 요상한 컵이 화분이었던 것.



토요일 아침, 무순이 먼저 싹을 틔웠다.

아이는 밥 먹으면서도, 양치하면서도 무순 싹을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묻는다.


"왜 보리는 안 올라와?"


무순은 여기저기 싹을 틔우는데 보리는 꽝꽝 무소식이다.

거듭거듭 물어보는 아이에게 그냥 좀 기다려 보라고, 축구 교실 늦는다고 재촉을 했다.



축구를 하는 우리 집 아이가 영 못마땅하다.

아빠랑 둘이서 찰 때는 좀 하는 것 같았는데 다른 집 아이들이랑 같이 차는 걸 보니 영 못한다.


같은 1학년인 다른 집 아이는 쌩쌩 달리며 경기를 주도하는데

우리 아이는 공을 열심히 쫓아가다가 공이 자기 앞에 오공에서 발짝 물러선다.


'지금 뭐 하는 거니?'


수비를 하는데 뒷짐 지고 공을 기다리는 모습도 답답하다.

옆에 있는 남편은 "저 정도면 잘하네." 하고 있다.

속이 터진다.


옆 자리에서 아이들을 지켜보는 엄마들 이야기가 들린다.

무슨 어학원에 다닌다는 이야기, 영어 테스트에서 몇 점을 받았다는 이야기.


비교가 된다. 조급해진다.

영어 학원을 보내려니 학원에서 알파벳은 떼고 와야 한다고 통보받은 우리 집 아이.


괜히 화가 나서 축구를 끝낸 아이에게 이렇게 거면 축구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다.



주눅이 든 아이와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남편을 뒤로하고

혼자 씩씩대며 집에 돌아와 보니 보리도 싹을 틔웠다.

그래도 먼저 싹을 틔운 무순의 자라는 속도가 빠르다.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이 지나고.

아이는 선생님께 배웠는지 아침마다 보리와 무순 화분의 물을 갈아주고

"사랑해, 자라."라고 응원을 한다.



보리는 언제 무순만큼 크겠나 했는데 날이 갈수록 보리도 무순만큼 쑥쑥 큰다.

하루에도 몇 센티씩 크는 것 같다.


우리 집 아이만 쑥쑥 자라는 줄 알았는데 보리랑 무순도 정말 잘 자란다.

시간이 지날수록 뒤늦게 올라온 보리가 무순을 따라잡을 기세다.

먼저 앞서가던 무순은 이제 시들해지려고 하는데 보리는 쌩쌩하다.


자라는 아이랑 참 닮았다.


내 아이는 보린데, 무순 옆에 갖다 놓고

왜 이렇게 늦게 자라냐고, 왜 이렇게 못하냐고 닦달한 건 아닌지.

기다려주면 제 속도대로 잘 자랄 것을

괜히 의심하고, 쑤시고, 다그치면서 아이가 자랄 기회를 뺏었던 건 아닌지.



성실하게 물 갈아주면서, 햇볕 쪼여주면서 기다려 봐야겠다.


우리 집 아이는 무순이 아니라 보리일 수 있으니까.

작가의 이전글 엄마의 지갑을 노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