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해서 미안했어 , 이제 안녕
재배한 옥수수가 상자째 버려질 위기에 놓였어요! 구출해주실 분 안 계신가요?
부부가 다급하게 SNS에 글을 올렸다. 다행히 옥수수는 글을 올린 지 한 시간 만에 무사히 구출(?)됐다. 귀농해서 삼 남매와 알콩달콩 지내는 부부는 올해도 역시나 타이바질부터 공심채, 오크라 등의 다소 특이한 식재료와 옥수수, 감자까지 하여간 이 여름에 맛있다는 것들은 죄다 거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열매를 거두고 돌아서면 또 거둬야 한다는 여름이라고 분주해하는 부부를 보니 유독 한가로운 우리 집 주방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이번 여름은 좀 이례적이었다. 먹을 게 지천이라는 여름인데 말이다.
자고로 여름엔 얼굴보다 큰 호박잎, 단단한 양배추를 데쳐 밥과 쌈장을 넣고 한입에 욱여넣어야 한다. 더워 쪄 죽는 한이 있어도 옥수수를 쪄먹어야 하고 토마토는 질리도록 먹어야 하며, 잘게 썬 오이는 비빔면에 담뿍 얹어 이른바 '비빔오이면'을 즐겨야 했거늘. 그러니까 여름 반찬이라는 것들로 끼니로 때우느라 바빠야 할 여름이었는데 올해는 유독 한가했다. 딱히 이유나 사정이랄 것은 없었다.
그러다 여름 끝자락에 들어서니 묘한 죄책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 사이 입추가 왔고 이젠 처서도 지나버렸다. 그나저나 이 죄책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올여름 우리 집은 외식과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때운 날이 꽤 잦았다. 샐러드마저 사다 먹을 정도였으니 사실 여름이 한가한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우럭회도 팥빙수도 우리 민족이라는 깨달음으로 배달 음식을 주문하는 것이 더운 여름의 미덕이라는 건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잠들기 직전 모바일로 구입한 식재료가 다음 날 새벽을 여는 것도 이젠 놀랍지 않은 세상이다. 최근 한 친구는 전자레인지나 에어프라이어에 돌리기만 하면 뚝딱 완성되는 간편식을 골고루 먹어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고도 했다.
이렇게 굶지 않고 아주 잘 먹고 있는데(심지어 살도 쪘다) 왜 우리 집 주방은 점점 한가해지는 걸까?
무언가 아쉬운 마음에 가는 여름의 끄트머리를 잡겠다고 다짐했다. 생협 매장에 가서 삼일에 걸쳐 각종 채소와 과일을 샀다. 그리고 요새 차고 넘친다는 양파도 틈틈이 장바구니에 담았다. 마치 시험 직전 벼락치기 공부를 하는 마음으로 토요일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토요일 아침, 일과는 쌓인 채소를 다듬는 것부터 시작됐다. 당근에 묻은 흙을 털고 끝이 누렇게 된 파를 씻고 다듬어 썰어 뜨거운 냄비 안에 넣다가 별안간 생각에 잠겼다. 땅속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을 이것들이 대체 어쩌다 우리 집 싱크대까지 오게 됐는지, 채 털리지 못한 이 흙은 과연 어느 땅의 흙이었을지, 가느다란 잎은 찢기지 않고 어떻게 가지런히 봉투에 담겨 왔는지 등 엉뚱한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사실 이런 생각을 처음 해본 것은 아니다.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채소를 직접 만지고 나서야 다시 깨닫곤 한다. 잎이든 열매든 줄기든 살코기든 결국 그 끝엔 ‘사람’과 ‘땅’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차, 또 잊고 지냈다. 먹을거리 시장의 어딘가 농업의 어느 귀퉁이에 있다는 나조차 이렇게 지내는 게 현실이다.
죄책감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집밥, 간편식, 배달음식, 외식 등 저마다 선호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음식을 먹고 산다. 어떻든 간에 농산물을 소비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화려한 음식과 분위기에 가려져 이 농산물이 과연 어디서 어떤 과정을 거쳐 접시에 담겼는지 알 필요도 알 길도 없어진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소비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에게는 찜찜한 부분이기도 하다. 뭐든 과정을 알면 결과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까닭이다.
이제 더 이상 대가족이 둘러앉아 엄마의 손맛이 깃든 집밥을 먹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다. 손맛이라면 집 앞 반찬가게에서 심지어 배달음식을 통해 원하면 언제든 즐길 수 있다. 몸에 좋은 건강한 음식을 먹자고 하면 유기농 식재료를 취급하는 식당이나 샐러드바를 이용하면 된다. 이런 편리함이 익숙한 세상에 고작 채소를 씻고 다듬지 않았다며 죄책감을 느낀다는 나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시대의 변화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혼자만 거꾸로 걷는 건 아니냐고, 너 또한 수혜자가 아니냐면서 말이다.
No Farm, No Food.
여행 중 어느 담벼락에서 발견한 문장이 떠올랐다. 관련 종사자이기 때문에 아마도 나는 이 한 문장에 많은 의미를 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정말로 사람과 자연의 존재를 가벼이 여기거나 잊게 되면 결국, 지금 우리 식탁 위에 놓인 맛있는 요리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내가 이따금씩 요리라는 행위를 통해 음식 그 너머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이유이다. 그러니까 잊지 않기 위해 능숙하지 않고 서툴러도, 번잡해서 귀찮아도 주방에서 채소를 씻고 다듬는 것이다. 특히 먹을 것이 지천이라는 이 여름엔 더 그랬어야 했는데 가는 여름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올여름은 작년에 비해 덜 더웠다고 하는데 땡볕에서 혹은 하우스 안에서 새벽을 맞는 이들에게 여전히 여름은 여름이었을 거다. 먹을 게 넘친다는 이 여름을 한가로이 보낸 뒤 얻은 죄책감. 누군가 한 번쯤은 아니, 가끔씩이라도 몇 번을 느껴보면 좋겠다. 나는 이 죄책감이 맛있는 한 끼를 지속하게 하는 힘이라고 믿는다.
이제 진짜 안녕, 여름
아쉬운 대로 이 여름의 끄트머리에서 여름 밥상을 복습해본다.
때마침 바질 페스토가 똑 떨어져서 양평의 어느 농부님께 잔뜩 바질을 샀다. 엄마가 한바탕 준 잣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냉장고에 깊숙이 처박혀 잊을 뻔한 고다 한 조각, 올리브유와 마늘을 꺼냈다. 밋밋한 빵을 특별하게 해 줄 바질 페스토가 완성되는 건 순식간이다.
한 발 늦어 옥수수는 사지 못했지만, 부부에게서 줄기콩(그린빈)을 구입했다. 한 번에 다 먹긴 어려워 뜨거운 물에 데쳐서 얼려두었다. 틈틈이 꺼내 볶음밥에 넣어도 좋고, 특히 오이나 양파, 토마토, 강낭콩 등 여름 채소를 한데 모아 식초나 레몬즙, 설탕, 후추에 버무려서 시원하게 먹으면 정말 맛있다! 여기다 한치나 오징어를 넣으면 세비체, 참 쉽쥬?
길쭉이 휜 가지는 반을 갈라서 작년에 발견한 황금비율의 양념을 끼얹어 들기름이 졸이듯 구웠다. 가지를 먹을 줄 알면 비로소 어른이라는데 그게 맞다면 저는 작년에 어른이 된 셈이다. 자랑입니다
양파가 넘친다는 소릴 듣자마자 떠올린 건 역시 카레였다. 이거 너무 많이 넣는 거 아냐? 할 정도로 카레에 양파를 잔뜩 넣으면 풍미가 정말 상상이다. 애매하게 남은 자투리 채소를 처리하기에도 이만한 요리는 없는 것 같다. 먹다 남은 토마토 몇 알을 넣는 것도 잊지 않기!
'옥수수를 나누는 자가 천사'라는 옛말이 있다. 옥수수킬러인 이여사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인데, 운이 좋게 올해 드디어 그 천사를 만나게 되어 옥수수를 받았고 거기에 감자도 받았다. 옥수수와 감자도 한데 모아서 쪘다. 옥수수는 순식간에 먹어치웠고 감자 샐러드를 만들었다. 그러고도 남은 감자는 채를 썰어 감자볶음도 완성!
난생처음 듣는 깻순이라는 것이 깻잎보다 덜 자란 야들한 잎이라는 걸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깻순과 두부는 데쳐서 조물조물 섞어 간장으로 간을 하고, 들기름으로 마무리하면 정말 기가 막힌 밑반찬이 된다는 것도 말이다. 여름이면 꼭 엄마가 해주던 깻잎김치도 담갔다. 맛에 비하면 정말 간단한 반찬인 것 같다.
그렇게 다 없어질 것만 같았던 채소가 또 남았다. 이럴 땐 아무래도 피클만 한 것이 없는 것 같아 집에 남은 식초를 탈탈 털어 촛물을 만들어 붓고 며칠 식혀두었다. 여기에 슬라이스 한 레몬을 넣는 것을 추천!
몇 시간을 주방에 있었는지 모를 이 토요일의 점심 겸 저녁은 메밀면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100퍼센트 제주 순메밀은 정말 맛 천재인 것 같다. 여기에 콩물을 붓고, 쯔유를 희석해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사실 한 달 전부터 사다둔 건데 귀찮다는 이유로 차일피일하다가 드디어 먹게 된 것이다. 이날 오전에 시작한 벼락치기 여름 요리는 결국 늦은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아, 이제 진짜 여름 같네!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을 넘기다 어질러진 주방을 보니 비로소 여름이 느껴졌다. 여름의 끄트머리에서.
하늘 보는 재미가 쏠쏠한 가을입니다. 개인적으론 여름 내내 좋지 않던 체력을 끌어올리기에 좋은 시기여서 아주 짧고 가볍게 디톡스를 하는 중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괴롭고 배고픕니다. 여하튼 가을이 코앞이니 아쉬운 대로 다음 여름을 기약하며 올여름을 보냅니다.
가을은 마른 햇빛이 내리쬐는 계절이라 겨울을 나기 위한 채소나 나물을 말리기 좋은 계절이라고도 하죠. 그리고 여름 내 땅 속에서 견뎌온 뿌리채소가 맛있을 때라고도 합니다. 사실 여름 글을 쓰면서 우엉채 조림을 했습니다만.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 이토록 서사가 뚜렷한 것이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고 좋아요.
지난여름 더위에 고생하셨을 생산자님께 감사드립니다. 벼락치기이지만 덕분에 맛있는 여름 반찬을 즐겼으니까요.
+) 사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