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 어디까지 느껴봤니
차라리 비라면 좋으련만!
주룩주룩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그가 말했다. 키보다 크고, 숲 보다 무성한 옥수숫대 밑을 걷고 있노라면, 가뜩이나 못난 얼굴이 오만상이 된다. 게다가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정체모를 벌레가 진로를 방해하는 것 자체가 공포다. 벌레를 피한답시고 몸을 함부로 놀렸다가는 억센 옥수수 잎에 쓱-하고 베어 생채기가 나는 건 순식간이다. 땀으로 범벅된 따갑고도 뿌연 눈을 비비적거릴 때, 얼핏 보이는 허연 옥수수 이빨이 반가워 미칠 지경이었다. 넌 대체 무슨 능력을 타고나서 이 더위에도 꼿꼿이 서 있니. 땀방울과 구시렁거리는 혼잣말이 마음속을 헤집었다.
서울 사람들 참 불쌍해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대표님, 지금쯤 에어컨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맞으면서 냉방병이네 뭐네하는 도시 사람들이 불쌍하다고요? 이 땡볕에서 생고생을 하시면서도 그런 말씀이…. 지금 절 놀리...ㅅ..ㅣ..
더위에 이성을 잃은 나는 옥수수고 뭐고 다 던져 엎어버리고 싶다는 말이 내 목구녕까지 차 올랐다.
이거를 있잖아요, 지금 막 따서 바로 쪄 먹으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옥수수를 맛볼 수 있어요. 원래 옥수수는 딴 순간부터 하루가 지날 때마다 당도가 30퍼센트씩 떨어지거든. 그래도 요새는 산지직송이다 뭐다 하긴 하지만, 이 옥수수가 소비자에게까지 가려면 최소 하루는 걸리잖아요. 이 맛있는 걸 도시 사람들은 알 수 없으니 아쉽지.
하이고, 지독하게 덥다! 이제 그만하고 어여 가서 옥수수나 쪄 먹으러 갑시다.
당장 이 더위를 피할 수 있어서인지, 서울 사람들은 못 먹어 불쌍하다는 그 옥수수를 맛보게 될 기대 때문인지 여하튼 더위에 치밀던 울화가 금세 가라앉았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그 옥수수 맛을 그리워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서울 사람들은 느낄 수 없다는 그맛을 말이다. 그 해 이후로 옥수수는 내가 여름을 기다리는 유일한 이유가 되었다.
대표님, 가지랑 고추가 너무 잦아요. 깻잎도 그렇고요. 게다가 깻잎은 상자를 열면 숨이 죽어있대요. 너무 더워서 그렇겠죠? 과일류가 좀 있으면 좋겠다고 하던데, 뭐 없을까요? 그럼 단가가 맞지 않겠죠?
일 년차, 아니 정확히는 이 사업을 맡은 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뻑하면 딸뻘 실무자가 찾아와 어려운 요청이나 푸념을 해대고 있으니 대표님도 얼마나 고달프셨을까 싶다. 당시 내가 맡은 사업은 무려 25주간 일주일에 한 번씩 그때그때 나는 농산물을 꾸려 소비자에게 보내는 일이었다. 8명의 귀·소농인으로 구성된 작목반과 약 250여 명이 소비자가 약 6개월 동안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까지 꽤나 긴 호흡을 함께 하는 셈이다.
- 아휴, 어떡해. 오늘 비 온대. 언제 그칠지도 모른다는데 큰일이네.
- 오! 이번 주는 좀 선선하면서 날도 좋으네! 아침엔 해도 잘 드는 모양이야.
- 태... 태풍? 어느 지방으로 오는 거지?
그땐 나도 모르게 날씨를 걱정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생산자님들 못지않게 폭염, 폭우, 태풍 걱정에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많았다. 그야말로 날씨에 울고 웃는다는 말이 딱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날씨 타령에 지인들이 혹시 몰래 농사를 짓는 게 아니냐고 물어 올 정도였다. 특히, 이 여름엔 더했다. 이 더위에, 그것도 노지에서 난 채소를 새벽에 갓 따서 꾸역꾸역 꾸려 보내봤자 금방 숨이 죽기 일쑤다. 가깝다는 양평-서울 간 거리가 어마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농작물이 타 죽는 경우도 많아서 당초 계획대로 소비자에게 보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이 여름엔 잦은 결품, 좋지 않은 품질, 줄줄이 소시지보다 더 줄줄이 소시지인 채소 때문에 보내는 이나 받는 이나 때로는 ‘고통의 상자’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소비자가 꾸러미를 관둘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이따금씩 향긋한 과일이 가득한 상자를, 계절별로 피는 다양한 꽃이 든 기분 좋은 상자를 받아보면 말이다. 여기에 생산자의 희로애락을 알게 되는 것 또한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일 년 동안 부디 유통 걱정 없이 생산자가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는 바람과 일종의 책임감도 한몫했다.
그렇게 힘들다는 한여름에도 꾸러미를 받아봐야 할 이유가 또 있다. 바로 이 옥수수 때문이다. '다음 주엔 옥수수가 가요'라는 알람은 마치 가문 땅에 단비와 같았다. 꾸러미에 있는 옥수수가 유독 맛있다는 소비자의 메시지에 대표님은 새벽에 따서 보낸 것이니, 마트에서 산 것보다 훨씬 맛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일분일초가 급하니 받는 대로 쪄드시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중간에 끼인 나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지만, 여하간 이 뜨거운 여름 고비만 넘기면 순조로웠다. 사무실에서 펜으로 농사를 짓는다는 말, 그 자체였다. 그렇게 마치 전쟁터와 같은 길고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나면, 봄부터 이어진 25주간의 여정은 드디어 끝이 난다.
지금은 다른 업무를 맡고 있지만, 이렇게 더운 날엔 그때가 생각난다. 게다가 올해는 연일 최고 기온을 갱신하는 불볕더위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자두와 복숭아가 마치 그을린 것 마냥 탔다는 기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물며 맨몸으로 메마른 밭을 뛰어다니는 그들은 어떨까. 유독 손과 얼굴이 까무잡잡했던 그 여름 대표님의 활짝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인건비 조차 나오지 않는 애호박을 농민이 직접 폐기한다는 기사도 있었다. 비가 오지 않아 많아진 일조량에 예년보다 생산량이 높아진 애호박 값이 폭락해버린 것이다. 기사에 달린 답글을 보고 있자니, 혹여나 농부님들이 보면 어떡하지 싶다. 마트에선 비싸게 팔면서 폭리를 취하는 거 아니냐, 정부 보조금을 얻으려는 꼼수 아니냐는 등의 수많은 의심과 조롱이 가득이다. 그들을 가까이 본 나로선 마음이 아파온다. 자식처럼 여겨온 당신의 농산물이 하루빨리 식탁에 오르길 바라는 그들이 이런 선택을 해야만 하는 마음을 헤아려보자니 말이다.
오늘도 날이 너무 뜨겁다.
누리지 못해도 어쩌랴,
옥수수 100배 즐기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옥수수를 먹는 방법
옥수수가 나는 곳 어디든 간다. 그 지역에 있는 ‘옥수수 쪄드립니다.’라고 쓰인 트럭을 찾아, 옥수수를 사 먹는다. 뜨겁게 김이 오른 옥수수를 한 알도 흘리지 않고 떼어먹는다. 어떨 때는 하모니카 불 듯 와그작와그작 연속으로 베어 문다. 맛있다는 호들갑을 떨면 더 맛있어지는 삘링적인 느낌.
사실 이삼천 원 하는 옥수수를 먹자고 지방까지 가긴 쉽지 않을 터. 되도록 산지직송 옥수수를 받아서 쪄 먹는다.
옥수수 껍질 한 겹만을 남겨 놓는다. 옥수수가 잠길 정도로 물을 붓고, 소금 한 스푼을 넣는다. 간혹 소금 반, 설탕 반의 비율로 넣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소금만 넣었을 때가 담백하고 맛있었다. 압력밥솥으로 밥을 짓는 방법과 동일하게 옥수수를 짓는다.
대표님과 엄마들(?) 피셜에 의하면 갓 딴 옥수수는 말 그대로 god이라 소금이고 설탕이고 일절 넣지 않아도 맛이 기가 막히단다. 아쉽지만 도시에 사는 우리들에겐 어렵지 않을까 싶다.
작년부턴가 초당옥수수의 열기가 높다. 어렸을 때 자주 보던 태국산 노랑 옥수수의 맛과 닮아있어서 일까, 나는 ‘클래식오리지날리티’를 추구한다며 찰옥수수를 선호하지만, 가끔 먹는 초당옥수수도 별미다.
초당옥수수는 알려진 대로 찌지 않고 그냥 먹어도 된다. 하지만 나는 증기로 살짝 쪘다. 개인적으로는 풋내가 덜 나서 훨씬 더 맛있다.
그러다 남아도는 양배추와의 컬래버레이션을 떠올렸다. 초당옥수수(일반 찰옥수수는 그냥 먹는 것이 제일 맛있고요)와 잘잘하게 썬 양배추와 양파 마요네즈만 있으면 KF*에 갈 필요가 없다. 여기에 소금과 후추, (있다면) 레몬즙을 넣어 버무리고 반나절을 냉장고에 둔다. 어디에 곁들여도 맛있는 코울슬로 완성! 외국산 옥수수캔으로 만든 것보다 훨씬 더 맛있고 담백하다. 급한 아침에 빵 사이를 가르고 코울슬로를 잔뜩 넣어 먹으면 출근길이 든든하다.
아니면 그냥 샐러드에 드레싱 뿌리듯 곁들여도 평타 이상이다.
조금 더 맛과 정성을 더해보자면, 방울토마토, 양배추, 양파 등의 여름 채소 잔뜩, 여기에 옥수수 알갱이, 치즈(없으면 패스), 바질을 넣어 올리브유에 버무린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맞추고 반나절은 잊고 지낸다. 꺼내어 그냥 먹어도 좋고 펜네를 곁들이면 초간단 제철 콜드 파스타 완성!
베이킹을 하는 분이라면 스콘을 만들 때 초당옥수수 알갱이를 넣으면 천상의 스콘이 탄생하는 말도 안 되는 신세경 같은 신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묵직한 버터 밀가루 사이에 톡톡 터지는 달달함의 신세계를.
여하튼 옥수수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으로 딱 하나만 기억하자. 일분일초가 아까우니 사자마자 주저 말고 쪄둘 것!
이 더운 날, 뜨거운 불 앞에서 옥수수를 찌는 건 사실 고역이다. 그래도 단 1초라도 빨리 쪄먹어야 한다는 대표님의 ‘갓 딴 옥수수 예찬’을 되새기며 서둘러 옥수수 껍집을 벗긴다. 얇은 겉 잎 한 장을 만지작거리면 마치 아기의 보드라운 살결을 만지는 것 같다. 아차차, 1분 1초가 아깝다! 손질한 옥수수를 압력밥솥에 넣고 서둘러 가스불을 켠다. 이내 뜨거운 열기와 구수한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 퍼진다.
옥수수 알을 떼어먹는다. 서울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대표님의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그리고 이 쫀득한 옥수수 알갱이를 씹으며, 한 알 한 알에 깃든 땀방울을 느껴본다.
이게 무슨 아이러니인가 싶지만 비가 많이 오면 과일이 밍밍하고, 가물면 다디달단다. 어쩌면 농부들은 불볕더위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고통보다 자식같이 키워온 녀석들은 내손으로 폐기해야 하는 현실이 더 고달플 것이다. 우리가 이들의 시름을 조금이나마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은 장바구니에 우리 농산물을 잔뜩 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뜨거운 여름, 더 많이 잡수시길!
오늘도 뜨거운 땡볕 아래
고군분투하실
이 땅의 모든 농부님께
무한한 감사를
-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보이지 않는 사람을 위해 행동하던,
어쩌면 우직한 농부와 닮아있는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이번 한 주를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