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가닉씨 Oct 25. 2018

다시 가을을 거두며

무더위 이기고 온 귀한 결실, 삶은 햇땅콩의 맛


우둑우둑 우둑우둑

단단한 땅콩 껍질을 까면 나오는 속이 꽉 찬 알맹이 두 알. 속살이 보이기 무섭게 입으로 가져간다. 다시 또 우둑우둑. 오동통한 땅콩의 고소하고 쌉쌀한 맛이 퍼질 때 목구멍으로 넘기기도 전에 손은 이미 다른 땅콩의 껍질을 벗기고 있다. 자고로 햇땅콩은 껍질 째 삶아서 그때그때 껍질을 깨 먹는 게 최고다. 호프집에서 흔히 먹는 얇은 속껍질을 벗겨 먹는 땅콩과는 또 다른 맛과 재미가 있다. 다시 우둑우둑. 한낱 이 작은 알맹이가 내게 기쁨을 주고 있다. 땅콩엔 맥주가 필수이지만 마시지 않기로 한다. 여름내 더위를 이기고 온 이 알맹이에게 내 모든 관심을 몰아주고 싶다. 탁- 하는 소리에 행여 한 알이라도 놓칠까 두려운 두 눈은 바닥을 훑느라 분주하다.

     

“그 두꺼운 비닐을 기어코 뚫고 나온 셈이지 뭐야. 그 작은 게 가뜩이나 더운데 얼마나 용을 썼겠어. 내년에는 비닐을 씌우지 말던가 아니면, 꽃이 지자마자 거둬야겠어.”     

우둑거리는 이 햇땅콩에겐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사연이 있다. 어머님 말마따나 지난한 과정을 겪고 ‘기어코’ 내 손에 들어온 녀석이다. 그 더운 여름께 심어둔 땅콩의 꽃이 지면 기다란 뿌리 같은 것(씨방 자루)이 땅에 떨어지는데, 신기하게도 이것들이 저 알아서 꽃 근처 어딘가에 자리를 잡아 열매를 맺고 그게 영글면 땅콩이 된다. 말 그대로 ‘땅에서 나는 콩’인 거다. 물론 모든 열매가 다 그렇다마는 씨를 심은 자리에서 뿌리내려 자라는 것보다는 주도적인(?) 성장 과정을 겪은 셈이다. 텃밭을 가꾸는 어머님은 씨방 자루가 떨어져 열매를 맺을 그즈음, 땅에 씌워둔 비닐을 미리 걷지 못한 게 계속 마음에 걸린다고 하셨다.


입으로부터 나는 우둑우둑 소리가 금세 귓전을 울린다. 문득 가을이 느껴진다. 정확히는 가을의 끝이 느껴진다.          





내 기억이 맞다면 어렸을 때의 가을은 그야말로 즐기기에 충분히 길고 훌륭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가을은 짧기만 한 '찰나의 계절'이 되어버렸다. ‘자고로 가을엔 맨투맨’이라며 옷을 꺼내 입는 남편의 말에 새삼 가을임을 실감했다. 밤낮으로 쌀쌀해진 날씨 탓에 몇 번 입지도 않은 가을 외투는 옷장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다. 식탁에 올려둔 삶은 햇땅콩, 검게 그을린 고구마, 못난이 귤은 가을의 끝자락을 확신하게 한다.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보다 따뜻한 차를 마신 지 오래다. 뒷 베란다엔 고구마가 수북이 쌓여있고, 냉장고에 있는 무와 당근, 달큼한 알배추가 든든하게 느껴진다. 여름내 먹던 생으로 먹던 채소는 점차 줄었으며, 밥상엔 삶고 끓이고 볶고 지져먹는 요리가 오르기 시작했다. 하우스 농사의 발달로 제철 채소가 별 의미가 없다지만, 기어코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계절을 외면하는 것 또한 쉽지만은 않다.


올해는 유난히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이젠 말해봐야 입이 아플 지경이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대과거가 되어버렸다. 아무래도 날씨 변화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농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일터에 있다 보니, 여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더위의 여파를 실감한다. 누군가에겐 그저 뜨겁기만 한 여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이번 여름이 생계를 위협하는 고통 그 자체였을 거다. 더위에 직격탄을 맞는 여러 상황의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중 농부와 가까운 나 또한 후자의 여름에 가까웠다. 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땅과 하늘의 시계는 잘만 흐른다. 타들어 가는 열매를 차마 제 손으로 떨구지 못해 고개 숙인 농부에게도 어김없이 가을이 찾아든 것이다. 봄과 여름을 지나면서 맺힌 풍성한 결실을 거두어들이고, 맘껏 즐겨야 할 가을이 유독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가을은 가을이로구나 @태안

일명 ‘가을걷이’ 시즌 앞에 나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네 음절을 되뇌어본다. 가.을.걷.이.


가을을 ‘걷다’ 혹은 가을을 ‘거두어들이다’

'가을걷이'의 의미가 중의적일 거라고 철썩 같이 믿는 것만 빼면, 가을걷이 시즌을 맞이하는 마음이 예년과는 사뭇 다르다. 지독하게 더운 여름날, 어쩌면 결실과 풍요의 상징인 가을을 즐기지 못할 수 있다는 노파심이 들기 시작한 때부터인 것 같다. 이렇게 더워 죽겠는데 과연 올해는 가을이 오기나 할까. 기뻐해야 할 결실이 있기나 할까. 고개를 숙이는 벼가, 땅심을 듬뿍 빨아들인 뿌리가, 주렁주렁 맺힌 형형색색의 열매가 있는.

         

다행히도 기우였다. 나보다 더 절절한 사람이 많았는지 올해도 결국 무사히(?) 가을이 온 것이다. 마트엔 가을을 대표하는 다양한 먹을거리가 넘쳐나고 여름내 불안했던 밥상도 안정을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올해도 서울 한복판에서 ‘가을걷이 잔치 한마당’이라는 이름으로 10월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건 더위를 이겨낸 결실과 사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더위 때문에 삐뚤빼뚤 못생긴 농산물을 지고 오는 농부의 마음은 여느 때보다 무거울 것이다. '더위를 이기고 와서 더 귀한 것’이라며 고마워하는 도시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긴 하지만, 무거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사실 어느 날인가부터 우리에게 10월 말께는 '핼러윈데이'로 더 친숙하다. 공교롭게도 가을걷이 시즌과 겹친 것이다. 여기저기서 관련 콘텐츠와 이벤트가 쏟아진다. 나도 한때는 10월의 마지막 날 밤엔 미어터지는 이태원 거리를 활보하는 게 큰 재미라 생각했던 적도 있다. 여하간 마음 가는 대로 즐기면 된다는 주의지만, 올해만큼은 부디 많은 사람들이 더위를 이기고 온 결실에 잠시나마 고마움을 느꼈으면 하는 건 큰 욕심일까.

  

 



저 악필아닙니다. 오글거려 부끄럽습니다만.jpg

폭염으로 여름 내 시름시름 앓던 시름도

사람으로 앓던 내 시름도

삶에 앓던 네 시름도

다 거두어버렸으면

부디 가을의 끝자락엔     

-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출근 후 책상 앞에 앉자마자 다이어리를 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라임 욕심 내는 래퍼처럼 적어둔 메모가 눈에 띈다. 지난 9월엔가 무료한 회의 중에 써두었던 것 같은데, 그때만 해도 여름인지 가을인지 분간이 어려워 선뜻 여름옷을 정리하기 어려운 때였던 것 같다. 별안간 무슨 시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가을엔 결실과 더불어 우리네 시름도 몽땅 다 거두어들이면 좋겠다. 도리깨질로 실한 알맹이만 곁에 두면 좋겠다.


어젯밤 챙겨둔 가을 몇 알을 꺼내 입에 넣어본다. 다시 우둑우둑. 역시 땅콩의 최고봉은 삶은 햇땅콩이다. 어느새 가을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무더위 이기고 온 귀한 결실
삶은 햇땅콩

호프집에서 얇은 속껍질을 벗겨 속 알을 쏙- 빼먹는 땅콩만 먹던 내게 ‘삶은 땅콩’은 생경하기만 했다. 땅콩 껍질의 주름 사이에 낀 흙을 툭툭 털어 제게 한아름 안겨주시며, 꼭 껍질 째 쪄먹으라는 농부님의 말씀에 어리둥절해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에게 이야기하니 내가 어렸을 때 자주 해주었다고 하는데, 전혀 기억이 없다. 아무래도 피자와 치킨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겠지 싶다. 지난주 캠핑할 때 삶은 땅콩을 싸갔더니 친구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속껍질을 벗기지 않고 그냥 먹으라고? 볶은 게 아니라 삶은 거라고?        

요리법이랄 것도 없습니다. 단단하고 누런 겉껍질 째 그대로 땅콩을 물에 삶기만 하면 되니까요. 사실 중요한 건 다른 데에 있습니다.      

삶은 땅콩을 한 김 식혀둡니다. 식었다고 한꺼번에 까두지 않고 그때그때 껍질을 깨 먹습니다. 희한한 듯싶지만 갈색인 속껍질(벗겨지지도 않지만)까지 그대로 먹습니다. 볶지 않고 물에 삶아서 오동통한 땅콩 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단점이 한 가지 있는데, 엔간한 의욕 가지고는 몇 알 먹고는 귀찮아지기 일쑤입니다.     

더 귀찮지만, 오래 두긴 뭣해서 땅콩 껍질을 벗겨 '생땅콩조림'을 해 먹습니다.

간장과 당류(설탕, 꿀, 올리고당 등)를 일대 일 비율로 섞어 물을 더해 바글바글 졸이면 그만입니다. 생땅콩 풋내가 싫다면 맛술 한 큰 술 넣어주어도 좋습니다.



         


그 해를 ‘정리’ 하기 위한 ‘마무리’의 계절로 대개 겨울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제게는 가을이 그렇습니다. 사실 올해는 이 결실의 계절을 보지 못할까 하는 불안함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올해 가을은 더 고맙게 느껴집니다.


벌써 올해로 여섯 번째 가을걷이에 참여합니다. 그게 대체 뭔지 궁금한 분도 계실 텐데요. 그 소회는 작년에 잔치를 치르고 난 후에 쓴 글로 대신합니다.

brunch.co.kr/@organicsea/13


아쉽지만 이 가을 끝자락,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까지 더할 나위 없이 즐기시기 바랍니다. 고구마, 무, 당근 같은 이맘때 나는 뿌리채소는 땅심을 담뿍 흡수한 것이라 겨울 체력을 비축해두기 딱 좋다고 합니다. 많이 많이 잡수시길!


올해도 무사히 찾아온

가을과 결실에 '새삼' 기뻐하며

오늘도 이 땅에 모든 농부님께

무한한 감사를






이전 08화 여름은 여름이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