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집 대신 맛을 찾아, 뉴질랜드
'맛집'에 대하여
나는 성격이 급한 편이라 기다리는 것에는 영 소질이 없다. 특히, 먹을 것 앞에서는 가뜩이나 제로인 참을성이 마이너스가 된다. 그래서 기다리는 것도, 먹는 걸 눈앞에서 참는 것까지 힘겨워하는 내게 ‘맛집 앞에서 줄 서기’란 상상만 해도 어려운 일이다. 물론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라고 극찬하는 식당’이나, ‘이 음식이라면 자고로 이 맛’, ‘이 지역에 오면 꼭 들러야 하는 맛과 멋’이라는 어느 전문가나 개인의 의미부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동의는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맛집이라고 해서 명성이나 기대만큼 만족스러운 곳이 없던 경험도 한 몫했다. 입맛이 까탈스러운 것은 아니고, 아마 맛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 그럴지도. 여하튼 탐방에 ‘실패’한 경험이 많은 나는 시끌벅적한 기다림 대신 조금 모자라도(혹은 모르지 더 맛있을지도), 느긋하고 널널한 집(대개 맛집 옆집)을 선호하는 편이다.
“거기까지 가서 그걸 안 먹어봤어?”
몇 년 전 등장한 ‘먹방’이나 ‘쿡방’의 영향으로 맛집 탐방이 여행의 필수 요소가 된 것이 개인적으로는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여행지 정보를 검색하면 관련 키워드 목록에는 #어디어디맛집이 빠지질 않는다. 느긋하게 기다릴 시간이 있다면 모를까 대한민쿡 직딩의 홀리데이는 길어봐야 열흘 남짓이기 때문에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이 기다림이 마냥 쉬운 일은 아니다(실은 인내와 자비가 없는 나의 성격이 한몫합니다). 오히려 맛집에 들르지 못한다거나, 막상 기대에 못 미치는 맛이라면 요상한 자괴감이 들곤 한다. 내게는 마치 ‘거기까지' 가서 ‘그곳’에 들러 ‘그거 하나’ ‘못’ 먹어봤냐는 일종의 타박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먹쿡방이 등장한 초창기에는 셰프들의 능수능란함에 침을 흘리고 쳐다봤지만 한때에 그쳤다. 내게는 신성한(?) 요리라는 행위가 무지막지하게 소비되고 소모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식재료보다 현란한 요리 스킬에, 과정 보다 군침 흐르는 비주얼과 맛 등 자극적인 것에만 치중하는 모습이 썩 내키지 않았다랄까.
요리를 못하지만, 좋아해서 괜히... 예민
그래서 지난 뉴질랜드 여행에서는 맛집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해 먹는 여행’이 최적화된 나라
뉴질랜드
지난 6월, 10년 만에 다시 뉴질랜드를 찾았습니다. 음식점에 들른 것을 손으로 꼽을 정도로 거의 매 끼니를 직접 해 먹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맛집 하나 없기로 유명한 영국령이었던 뉴질랜드에는 이렇다 할 대표음식이나 맛집을 찾아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소금과 후추에 대충 볶아먹어도 평타 이상은 친다는 신선하고 풍부한 식재료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뉴질랜드는 호텔이나 펜션 대신 백팩커스(backpackers)라는 형태의 숙소가 발달돼 있어 ‘해 먹는 여행’에 최적화된 나라이기도합니다.
자연보호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뉴질랜드는 편리를 위한 약간의 불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 여행자가 몰려든다는 뉴질랜드의 어느 명소도 거점 도시를 제외하면 관광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높은 건물이나 상점이 많지 않고 고요합니다. 도로 하나 내는 것에도 인색(?)하다 보니, 대부분 여행자를 위한 숙소는 구석진 데에 위치해있습니다. 밤 8시만 돼도 가로등불 하나 없이 주변이 온통 새까맣고(?) 인적이 드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렇다 보니 저녁 느지막이 백팩커스에 들어오는 사람들 손에는 식재료가 든 비닐봉지가 들려있습니다. 외식이 어려워 직접 요리를 해 먹기 위해서죠.
덕분에 백팩커스의 주방은 여행자의 허기를 달래주는 중요한 장소이자, 또 다른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의미 있는 공간이 됩니다.
버터 남은 거 좀 있어요?
10년 전 뉴질랜드 최북단에서 먹고 놀고 일하던 베짱이 한량 시절, 당시 묵고 있던 백팩커스의 주방에서 가장 많이 듣던 말이었습니다.
백팩커스의 주방은 제게 요리하는 공간, 그 이상의 의미입니다. free box라고 표시된 선반이나 냉장고 한편에 놓인 누군가 놓고 간 여러 종류의 소금과 후추, 충분히 쓰고 남겨진 반 토막의 채소들, 유통기한이 임박한 우유와 빵, 본 적도 없는 희한한 향신료 등을 공유하다 보면 어느새 눈인사가 안부로, 그리고 일상의 대화로 이어지면서 수많은 인연이 탄생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말이 통하지 않아도 요리하는 행위 자체가 언어이자 대화가 되는 진귀한 장면이 연출되곤 합니다. 다양한 나라의 정체모를 음식과 어느 할머니의 할머니부터 내려온 레시피도 어깨너머 볼 수 있는 행운이 만발한 그곳이 바로 백팩커스의 주방입니다.
나의 첫 경험이 이런지라, 늘 복닥스러운 백팩커스의 주방을 기대하는 것이 내 여행의 의미이자 일부가 되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고마운 경험입니다.
백팩커스 주방에 있는 소금과 후추, 이름 모를 향신료, 빵집에서 산 조각 버터와 스시집에서 챙겨 온 간장, 현지에서 구입한 토마토소스로 볶고 지져서 다양한 맛을 냅니다. 여러 사람과 요리하면서 마시는 맥주는 뭐랄까요, 에블바레 파리피플의 늬낌이랄까요. 물론 저 혼자만의 생각입니다만.
이날은 후커벨리(Hooker Valley) 트래킹을 앞두고 있어 아침부터 든든히 챙겨 먹었습니다. 가져간 한국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해장하고 난 후, 만년설을 앞에 두고 설거지하는 우리 넘편. 집 앞에도 만년설을 가져다 두면 설거지를 바로바로 하게 될까요.
이렇게 거의 종일 트래킹을 하는 일정이라면 간단한 도시락(?)을 싸다니기도 합니다. 십 년 전 이곳을 여행할 때도 그랬고, 동유럽 일주 중에도 식빵과 땅콩버터는 저의 필수 준비물이었습니다. 가난한 배낭 여행자로서 돈을 아끼는 나만의 노하우였지요. 물론 그 돈으로 맥주를 무진장 사 먹었다는 것은 비밀입니다.
뉴질랜드에서는 이 레토르트 파이가 도시락으로는 최고의 메뉴인 듯합니다. 백팩커스 주방에 있는 오븐에 뜨끈하게 익힌 파이와 음료를 챙겼습니다.
십 년 전에는 싸고 맛있어서 하루도 안 빠지고 거의 매일 먹다시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저걸 매일 먹고살았을까 싶어요. 엄청 짜고 느끼한 맛이거든요. 십 년 동안 정작 뉴질랜드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데, 아마 제 입맛이 변했거나 아니면 저 파이 맛이 바뀌었거나 둘 중 하나겠죠. 그런데 후커벨리 끝자락에서 맛 본 파이의 맛은 예술이었습니다.
사실 남섬 여행에는 한 명의 멤버가 더 있었습니다. 우연히 백팩커에서 만나게 된 한국 청년입니다. 첫날 첫 숙소에서 만나 짧은 인사와 맥주 한 잔을 나누고 헤어졌는데, 다음 날 다른 숙소에서 또 만나게 된 겁니다. 그때도 신나게 저녁을 나눠먹고 헤어졌는데 또 다음 숙소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뭐, 돌고 도는 이야기.
결국 남섬에서의 대부분의 저녁 식사를 이 친구와 함께 하게 됐습니다. 남섬의 마지막 도시인 퀸스타운(Queenstown)에서는 다른 숙소에 묵었는데, 마지막 저녁이라며 조촐한 파티를 한답시고 또 모였습니다.
퀸스타운에서는 호스텔이 아닌 개인 부엌이 딸린 아파트먼트에 묵었습니다. 꽤 오랜 기간 여행 중이던 이 친구가 한국음식이 땡긴다 해서 착하고 친절하기 짝이 없는 저는 닭볶음탕을 준비했습니다. 퀸스타운에 있는 한인마트에서 닭볶음탕 소스와 마트에서 실한 닭다리와 채소를 구입했습니다. 다 넣고 마냥 끓이면 됩니다.
백팩커스 주방에서 시작된 인연이 한국 음식으로 더 끈끈한 정을 나누게 됩니다.
드디어 남섬 여행을 마치고, 북섬에 있는 오클랜드(Auckland)로 가는 날. 미리 예약해두지 않아서 부랴부랴 비행기 타기 직전에 삼 일 동안 묵을 숙소를 에어비앤비로 예약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횡재인지, 오클랜드와는 거리가 제법 있지만 너무나 마음에 드는 숙소를 잡았습니다.
오호, 이곳에도 백팩커스 주방의 free food box를 볼 수 있었습니다. 주인이 준비한 것이겠죠. 일 때문에 조식을 따로 챙겨주지 못한다는 집주인의 배려가 돋보입니다. 자기가 없으니 마음껏 뭐든 편히 사용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말입니다.
고맙습니다. Sue아주머니!
우리나라 마트와 마찬가지로 저녁 늦게 이곳을 찾으면 일명 '떨이'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있습니다. 고기 앞에 선 그의 뒷모습만 봐도 활짝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그려집니다.
뉴질랜드 마트에는 씻어 나온 샐러드용 채소와 베지스틱, 해산물 모둠 등 뭐든 간편히 해 먹기 쉬운 형태의 상품이 많았습니다.
그냥 사다가 지지고 볶았을 뿐. 최소한의 조리만으로도 근사한 한 끼 차림이 가능합니다.
둘째 날 아침, 나름 조식.
제가 제일 좋아하는 그린스무디와 함께 했습니다. 저기 놓인 각종 잼과 버터, 빵까지 프리.
사실 이곳에서 우리는 특별한 날을 맞았습니다. 결혼기념일이었거든요.
되는대로 오일을 둘러 왕새우를 볶고, 그린 머슬은 쪘습니다. 넘편은 역시나 스테이크를, 저는 연어 샐러드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비싼 레스토랑에서 보다 더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접시를 비웠습니다.
마지막 날 밤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져온 남은 햇반과 라면을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여행 중 식당에 들른 경우를 제외하고는 생각해보니 우리의 매 끼니는 소고기와 해산물로 시작해 맥주와 와인으로 끝났습니다.
지금 아니면 어쩌면 평생 동안 맛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맛집에 줄 서는 것 대신, 차고 넘치는 현지의 식재료로 직접 끼니를 해결하는 여행을 즐겼습니다. 맛집 못지않은 이곳의 맛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변한 것이라고는 10년이라는 세월을 직격탄으로 맞은 나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뿐.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늘 내 마음속 그리운 그곳, 뉴질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