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예찬
청천벽력과 같은 비보를 들었을 땐 생각나지 말아야 할 것이 떠올랐다. 별안간 요리가 하고 싶었다. 동네 몇 바퀴를 돌고 나서 두 손 가득 장을 보고 들어왔다. 밥을 안치고 가스불을 켰다. 두꺼운 파를 반으로 가르고, 서걱서걱 칼질을 해대는 이유는 간단하다. 파가 들어가야 국 맛이 사니까 말이다. 들기름에 달달 볶는 것만이 삭아버린 김치를 구할 방법이다. 참기 어려운 쉰내는 설탕으로 잡아줘야 한다. 이것이 김치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기도 하다.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하고 날카로운 침착함은, 당장 칼을 쥐어야 하는 두 손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완성된 반찬을 도시락 통에 덜어냈다. 그간 귀찮아하지 않던 마무리 깨도 어쩐 일인지 정성스레 쏟아부었다. 모든 과정이 생각보다 매끄럽고 차분했다. 두부 반모가 냄빗 속에 빠져버리기 전까진.
우습게 봤던 두부 반모는 가볍고 미끄러웠다. 손에 든 두부와 냄비의 거리도 생각보다 멀었다. 두부의 무게와 거리, 미끌거리는 손의 잔동을 계산해내지 못한 나는, 결국 두부를 놓쳤다. 사방에 요란스러운 물을 튀기며, 두부가 겨우 냄빗 속에 들어갔다.
대형마트에 자리한 고기 매대를 지나는 것은 끔찍하다. 가깝고도 먼 그렇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들이 내보인 살덩이의 전시일 뿐이다. 발갛고 허연 그것들이, 정갈히 포개져 번쩍거리는 랩에 싸여 바코드를 붙인 채 놓여있다. 대부분 그냥 지나치기 일쑤지만 고기를 좋아하는 남편을 생각해서 합리적인 가격의 것을 집어 올린다. 그런데 그 값이 과연 합리적일까? 그를 죽이고 뼈를 바르고 비곗덩어리를 제거하고 핏물을 닦아낸 비용이라는 게, 거기에 이건 사람이 하는 일인데 이 엄청난 일을 한 그에게 대체 ‘비용’으로 치러져야 하는 것이 맞는가 하는. 그리고 그게 과연 합리인가 하는.
어쩌다 끝이 닿지 않는 생각을 한 그날은 꼭 한 근, 두 근, 혹은 몇백 그램에 값을 매긴 검은 봉다리가 손에 들려있다. 그제도 난 김치찌개에 고기를 넣었다. 국물엔 아무래도 고기 육수가 좀 베어야 한다면서. 요리가 그간 잘 쌓아 올린 신념의 정강이를 차 버리는 것도 같아 참 기괴하다.
나는 바깥 음식을 좋아하면서 직접 해 먹는 음식의 위대함에 대해 쓴다. 소박하고 담백한 맛을 내고 싶어 하면서 뭐든 소스를 잔뜩 찍어 먹는다. 화려한 건 싫지만 요란한 상황을 즐기고, 외향적이지만 혼자 생각하고 싶은 건 절대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내 멋대로 살고 싶지만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동글동글 평화를 지향하면서도 극도로 예민하다. 어쩌면 떠오르지 말아야 할 순간에도 요리가 떠오르는 건 겉과 속, 안과 밖이 다른 나의 기질에 반하지 않은 행위일지 모른다.
내가 이토록 요리에 집착하는 이유가 뭘까. 어제보다 덜 피곤한 하루를 보내면 제일 먼저 요리에 대한 욕망이 들끓는다. 아주 피로한 날에도 요리를 향한 강한 욕구가 절정에 달한다. 이럴 땐 무거운 몸을 반듯하게 세워 요리를 할 때도 있고 그냥 생각으로 그칠 때도 있다. 요리는 내게 마치 무탈한 하루를 보냈다는 증거인 셈이다. 아니, 속이 끓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고 온 몸으로 뿜어내는 발악과 같다.
기혼이지만 비혼의 삶을 들여다보고, 성 정체성이 뚜렷하지만 다양한 성을 가진 사람들끼리 떠는 수다를 들으며, 뚝딱 국을 끓이고 달걀을 반듯하게 말아부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키득대거나 고개를 갸우뚱해하면서 한시도 냄빗 속 끓는 것들이 타버리도록 둔 적은 없다. 요리할 때만큼은 평소엔 눈꼽만큼도 없는 이해와 배려가 넘쳐 난다. 예민한 기질은 오로지 기특하게 완성될 결과물을 믿고 따르므로 한없이 무뎌진다. 요리의 실패가 딱히 두렵지 않은 이류는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하기 때문이다. 짜거나 맹맹하거나 묽거나 되거나 뭐 이 정도이니까. 이럴 땐 소금이나 간장을 넣어 다시 간을 맞추고 물이나 소스로도 농도를 다시 조절해 충분히 수정이 가능하다. 그마저 괜찮다고 여기면 다음의 성공을ㅡ정확히는 성공에 가까운ㅡ다짐하고 그냥 먹으면 그만이다. 가스불을 끌 때가 되면 나는 여전히 무탈하다고, 치열하고 바쁜 이 세상에서도 난 이런 여유쯤은 부릴 줄 아는 멋쟁이가 되어있다.
경조사를 겪은 지인에게 줄 선물로 제일 먼저 직접 한 요리를 떠올리지만, 좀 더 실용적인 걸 찾게 된다. 요리는 때로 나만의 착각, 그 이상의 자아도취일 수 있다는 경계도 늦추지 않는다. 그래, 이 난리통에도 요리하는 나는 완벽하다.
다시 보기에도 민망한 내 책을 들춰보았다. 언젠가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던, 그 문장을 쓰고도 먼저 안부 전할 생각조차 해내지 못한, 그 와중에 마침표를 찍고 뿌듯해마지 않던 당시를 회상했다. 삼사 년 전 여름 즈음, 오래도록 비포장 도로를 달려 도착한 그곳의 단란한 어느 가족의 모습이 그저 눈을 뜨겁게 달궜다. 옆엔 커다란 밭이 있었고 고가 밑이라 동굴처럼 쩌렁쩌렁 울리는 우리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큰 맘먹고 구입했다는 커다란 물놀이 튜브에 바람을 넣느라 고생했을 그와 가족들, 고가가 통째로 흔들릴 정도로 쩌렁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농사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면서도, 그간 사무실에서 보아온 얼굴보다 훤해 보여 덩달아 마음이 좋았다. 뭐든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던 그의 한 마디가 뒤늦게나마 떠올라 다행이다 싶다.
갑자기 생각난 몇몇에게 전화와 메시지를 보냈다. 세상에 바삐 쫓겨 한 상 차릴 시간 따위 없어서 사 먹기만 해도, 그만한 여유가 어디냐고 씁쓸히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깟 요리는 하지 않으도 좋으니 그저 무탈하기만 하자고. 멀어진 모든 이들에게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니 지금처럼 연락은 하지도 받지도 말자고 기도했다. 모든 애도는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그 끝을 맺는다.
은근히 요리 좀 할 것 같은 그가 부디 좋은 곳에 가길 바란다. 남겨진 가족이 무탈하도록 돌보길. 그곳에선 좋아하는 술도 많이 잡숫고, 아프지 말고, 못다 한 여유를 즐기시길. 그리고 그가 그토록 바라던 세상을 누리길 진심으로 바란다.
부족한 문장을 쓰고, 이틈에도 나를 위해 요리하는 것밖에 하지 못해 마음이 무겁다.
풍덩하고 빠진 두부 반모가 부들부들 잘도 익었다. 남편이 도시락 뚜껑을 열고 고소함을 느낄 것을 상상하니 안도가 찾아왔다. 채 식지 않아 뜨끈한 두부 조각을 입으로 가져갔다. 맛이 요란하지 않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