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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가닉씨 Dec 12. 2022

한 겨울에 맛보는 한 여름 맛

눈물 젖은 빵에 대하여




벌겋게 부어오른 환부가 진한 살색이 되었다. 경계가 선명한 상처로 남았다. 너무 뜨거워 아득할 정도로 차가웠던 당시의 느낌을 떠올리면 아직도 몸서리가 쳐진다.

지난여름, 빵을 굽다가 열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오븐 문짝에 양팔을 데었다. 너무 아파 깩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작업 중이던 반죽 덩어리를 오븐 끝까지 밀어 넣었다. 그제야 싱크대로 달려가 벌건 팔에 차가운 물을 콸콸 부었다. 잡고 있던 나무판을 던져버리지 않고 작업을 마친 나는 순간 프로가 된 건가? 하는 자아도취도 잠시 했던 것 같다. 이내 밀려오는 욱신하고 뾰족한 고통이 괴로웠다. 그날은 그야말로 ‘눈물 젖은 빵’을 구웠다.


하필 다친 때가 한여름이라 고생깨나 했다. 가뜩이나 더운데 양팔에 붕대를 감고 오븐 앞에 선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초동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고 병원을 늦게 가는 바람에 상처가 더 깊어졌다는 원망도 뒤늦게 들었다. 무엇보다 오븐 문을 열어젖힐 때마다 매번 같은 차원의 고통이 떠올라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만하길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허연 내 팔뚝에 떡하니 자리한 상처를 볼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무리 영광의 상처라고 자위해도 모든 상처는 영광이 될 수 없다. 아마 매해 여름마다 나는 그때의 고통을 상기하며 살아갈 것이다.


오븐 앞에 선 삶을 선택한 순간부터 한여름은 공포의 계절이 되었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봤자 큰 오븐이 뿜어내는 거대한 열기를 식히기엔 역부족이기 때문이었다. 높은 온도에 손보다 빠른 발효 속도에 뒤처질라 그 작은 작업실을 뛰어다녀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크고 작은 사고가 나기 일쑤였다. 한여름엔 먹을 게 지천이라 식탁에 이롭다는 나의 믿음에 균열이 생겼다. 입으로만 이해했던 ‘한여름 농사’의 고통에 대해 그제야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얄밉도록 예쁜 빨강

명색이 한때 ‘한여름’을 주제로 글을 쓰고 ‘한여름 맛’을 좋아했던 인간인데, 상처를 입었다고 해서 마냥 가만히 있을 수만도 없었다. 여름 내내 틈나는 대로 방울토마토를 오븐에 말리고 또 말렸다. 마치 엄마가 겨울이 되기 전부터 골백 번 이야기하는 김장의 무게만큼 나 또한 결연히 토마토를 말리고 올리브 오일에 절여두었다. 여전히 오븐 문을 열기가 두려웠고 그 기억이, 그 고통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던 이유는 극복해야 한다는 의지보다 애증에 기인한 것이었다. 오기이기도 했다. 한편으론 한여름 맛을 반드시 저장해 두어야 한다는 의무도 있었다. 오븐에 들어간 방울토마토의 색깔은 더 선명해졌고 꾸덕해졌으며 얄밉도록 달고 짠맛이 강해졌다. 마늘과 각종 향신료, 허브와 함께 병에 담고 뚜껑을 꽉 잠갔다.

여름 내내 토마토를 봐서 그런지 유리병을 열어볼 생각이 딱히 들지 않았다. 아니 실은 양팔에 새겨진 상처가 선명해질수록 한여름의 상징인 토마토에 대한 분노가 일어서였다. ‘한여름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집을 찾는 손님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정작 나는 이를 사랑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그렇게 냉장고 깊숙이에 처박힌 병을 꺼낸 건 차가운 겨울이 오고 나서였다.



기호에 따라 다른 페스토를 추가해도 좋다. 단, 많이는 말고!

뜨겁게 달궈진 팬 위에는 하얗게 굳은 올리브 오일, 꾸덕하게 굳은 방울토마토, 거멓게 샌 로즈메리와 바질 잎이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굳은 오일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파바박 오일이 튈 즈음에 새우와 마늘을 추가해 휘리릭 볶았다. 잘 삶아진 파스타면을 넣고 면수를 부어 농도를 조절했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스톡 stock 없이도 맛깔난 오일 파스타가 완성되었다. 한여름부터 지금, 그러니까 겨울까지 오래도록 걸려 완성된 한 접시였다.

짜고 달고 시큼한 토마토의 감칠맛이 면에도 잘 스몄다. 과할까 했던 향신료도 그 향이 수그러져 적당히 어우러졌다. 맛있다를 연발한 그 순간만큼은 매일같이 떠오르던 한여름의 상처를 잊을 수 있었다. 남은 오일엔 내가 구운 바게트를 곁들여야 하는 것이 이 식탁의 룰이다. 남편과 나의 입에서 두 번째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여름과 가을, 겨울을 보내면서 화상 말고도 나는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원인 모를 손가락 염증에 일주일 간 빵을 굽지 못했고 칼에 손가락 끝을 베어 한동안 불편하게 빵을 구워야 했다. 슈퍼 항체라고 자부했던 나는 결국 코로나19에 감염되었고 한동안은 잔기침을 달고 살았다. 그 사이 내 작업실 밖 공장에서는 한 노동자가 기계에 끼인 사고도 일어났다. 아마 뉴스에 나지 않았을 뿐 어쩌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내게 빵을 만드는 동료이자, 나는 스무 살 초반인 그의 어른이다. 하물며 이렇게 작은 내 작업실에서도 이럴진대, 규모가 큰 곳은 어떨지 가늠하기 조차 어렵다. 동료로서 그리고 그의 어른으로서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사무실 안에서 주욱 고개를 빼고 모니터를 들여다볼 때와는 전혀 다른 연대를 느꼈다.


그렇게 눈물에 젖은 내 빵은 손님에 의해 서서히 말라갔다. 여름 내내 쟁여둔 방울토마토 오일 절임에대한 애증은 걸작의 파스타 한 접시에 비로소 누그러졌다. 아프지 말고 오래도록 빵을 구워야 한다는 어느 어르신의 말씀은 매일 새벽 적당한 긴장을 불어넣어 준다. 다행히도 나야 이렇게 치유하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의 고통은 어떨지 말로는 안다 해도 분명 다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2022년 12월, 이 겨울 한가운데 서서 누군가에겐 까맣게 잊혔을, 그리고 누군가에겐 더 선명해진 그 여름 상처에 대하여 쓴다.







한 겨울에 맛보는 한 여름 맛


먼저, 이 한 접시를 완성하기 위해선 여름부터 겨울까지 익고 익어야 할 눅진한 시간이 필수임을 밝힙니다. 아마 그냥 오일 파스타와는 다른 감칠맛일 거예요. 내년 여름부터 시도하시는 걸 추천합니다.



*토마토 절임 | 한여름과 방울토마토, 올리브 오일, 편 마늘, 로즈메리, 바질, 통후추, 소금 모두 기호에 맞게

방울토마토는 반으로 가르고 낮은 온도(130~150도, 오븐마다 컨디션이 다름)에서 두 시간 말립니다. 상태를 봐 가면서 온도를 1~20도 정도 올리고 한 시간 정도 더 둡니다. 토마토 단면에 물기가 사라지고 꾸덕해진 상태가 되면 완성입니다.

소독한 유리병에 방울토마토와 편 마늘, 바질, 로즈메리 등을 넣고 내용물이 잠길 때까지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을 붓습니다. 뚜껑을 덮고 이삼일 실온 보관 후, 냉장합니다.

확실히 바로 먹는 것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주로 병의 존재를 잊을만할 때 즈음, 그러니까 겨울에 꺼냅니다.

꼭 파스타가 아니어도 샐러드나 빵 소스로도 활용할 수 있어요.

*토마토 절임 파스타 | 토마토 절임, 스파게티, 추가 편 마늘과 소금, 후추, 기호대로 새우, 버섯, 각종 페스토 등 그리고 맛있는 빵

달군 팬에 하얗게 굳은 내용물을 올립니다. 오일이 녹으면 추가 재료(새우, 마늘, 조개 등)를 넣어 휘리릭 볶습니다. 잘 익은 스파게티를 넣고 면수로 농도를 조절합니다. 소금 간은 면수를 넣고 끓인 후에 합니다. 면수 자체에 소금기가 있어서 잘못하면 짤 수가 있거든요. 후추와 파르메산 치즈로 마무리하면 끝! 올리브 오일 향을 즐긴다면 오일을 한 번 더 휘휘 둘러줍니다.

남은 오일엔 맛있는 빵은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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