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같아라.
그대. 나의 바다. 사랑하는 이를 나는 여해如海라 불렀다. 온갖 물을 받아들이되 차고 넘치는 법이 없는 큰 바다처럼 내 어리석음 마저도 안아주길 바랐다.
여러 계절이 흘러 서로를 하나로 이어주던 인연의 고리는 마침내 낡아 부서졌다. 갈림길에 선 둘은 잡았던 손을 놓고 각자의 길을 나선다. 때때로 일어나는 옛 감정의 너울에 가슴이 아리지만 또렷하던 기억이 날로 흐려지기에 그런대로 견딜만하다. 어린 사랑은 그렇게 저문다.
해가 지면 어둠이 오고, 달이 차면 기울고, 더위가 가면 추위가 따르고, 소녀는 늙어 노파로, 만남은 이별로, 기쁨은 슬픔으로, 피고 지는 꽃처럼 차오른 것은 무엇이든 비워지기 마련이다. 시작은 언제나 끝을 예고한다. 그리고 시점과 종점은 모양을 달리하며 맞닿아 돌고 돈다.
변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그러하다. 연인 관계도 다름없다. 그런데도 미련을 놓지 못한다. 이미 곁을 비운 옛 임이 행여 돌아올까 하염없이 기다리며 아름다운 체념이라 자위한다. 헤어져 멀어진 오늘의 너와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다정했던 우리는 아니다. 싸늘한 현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어 깊어가는 상처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애별리고愛別離苦라 이름 하셨다.
오직 나만 바라보기를, 내 옆에 항상 그 모습으로 남아주기를, 내 전부를 수용하기를, 세상이 나를 버릴지라도 신뢰를 거두지 않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기적 욕망은 꿈의 영역에서나 가능할 뿐 끝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세차게 굽이쳐 흐르는 애욕의 물결에서 불멸의 사랑을 구한 대가는 괴로움이었다. 그 고苦의 뿌리는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라는 집착이다.
덧없이 떠나버린 님을 여읜 빈자리에, 우주만물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깨달음이 반짝인다. 영원불변한 실체란 어디에도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진리는 무상無常과 더불어 한 쌍이다. 이러한 이치를 애써 부정하며 거스르다 고해苦海에 빠질 때 이를 일러 일체개고一切皆苦라 한다. 반대로 마음에 착심을 놓아 망념의 불길을 끊을 때 찰라 열반적정涅槃寂靜에 든다.
이렇게 일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四法印)을 알아차려 마음의 미혹을 걷어내는 과정 과정이 수행이다. 그제야 비로소 지난날의 아픔과 어리석음이 가치를 드러낸다. 번뇌가 보리菩提(지혜)로 피어나는 순간이다.
부처님은 불법佛法을 약으로 알아 삼켜 마음에 배인 탐진치貪瞋痴 세 가지 독(三毒)을 제거해 내는 병든 중생을 북돋으시고(慈), 그러지 못해 고통의 수레바퀴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신다(悲). 부처님은 큰 바다와 같은 너른 품에 모든 중생을 따스하게 안아 중생이 스스로의 틀(我相)을 깨고 나오는 그날까지 갖은 방편으로 포기 없는 자비慈悲를 베푸신다.
이제는 나에게 여해如海라 불러본다. 바다와 같아라. 한 중생도 놓치지 않으리란 서원을 담아.
바다가 온갖 수족水族의 의지依止하는 집이 되는 것과 같다. 부처님들도 또한 그러하며 온갖 중생과 온갖 선법善法이 의지하는 바가 되신다. - 際蓋障所問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