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 공양
시들어 낮게 깔린 풀대 사이로 이른 봄바람에 남 먼저 머리 내 민 고사리 순이 조막손을 닮았다. 밀짚모자에 팔 토시를 하고 장화를 신으니 제법 농부 꼴이 난다. 마대자루 하나를 쥐고 비탈진 밭에 나선다. 간격 맞춰 친 줄을 따라 제 자리에 찾아 든다. 아래에서 위로 오르며 한 뼘 길이로 고사리를 꺾는다. 하나라도 놓칠세라 손이 바쁘다. 여전히 숙이는데 익숙하지 못한 뻣뻣한 허리를 달래려 때때로 기지개를 켠다.
새벽기도 마치자마자 동틀 녘부터 시작된 고사리걷이는 아침공양 시간을 넘겨 햇살 뜨거워질 때라야 마치기 일쑤였다. 배부른 자루를 어깨에 걸치고, 어린 고사리를 밟지 않게 발을 조심히 내 디디며 걸어 나와 트럭에 몸을 싣는다. 물 끓는 큰 솥 곁에 차를 대면 그날의 수확을 내려, 엄지와 검지로 눌러 살짝 말캉할 때까지 삶는다. 뜰채로 건져 찬물에 행군 뒤 양지바른 곳으로 옮겨, 미리 깔아둔 망網 위에 넓게 펴서 말린다.
벌레가 집을 튼 고사리가 늘어갈 즈음, 고사리 사이사이로 무수히 싹 트는 풀을 부지런히 뽑아낸다. 고사리가 무성하게 자라 다른 풀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비료 한번 뿌리고선 그해 농사를 갈무리한다. 삼월하순에서 유월 초까지 일주일에 서너 번, 나의 일과는 그러했다.
고라니와 멧돼지가 먹지 않는 고사리는 다른 작물보다 기르기 수월했다. 게다가 지리산이란 명성까지 더해지니, 입소문을 타고 주문이 줄을 이어 물량 대기 버거웠다. 도량 살림에 보탬이 될뿐더러, 계절 변화와 일기에 순응해 순서에 맞게 일 해나가는 과정 과정이, 순리대로 정진해가는 수행과 진배없다.
훈련원장 효타원 김법은 교무님께서 제법 두툼한 봉투를 건네주셨다. 고사리 팔아 번 돈을 부처님께 올리고,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에서 희생된 분들을 위한 천도재薦度齋를 모시라고 당부하셨다. 49재에 보좌는 더러 했어도, 주례는 처음이라 조심스러웠다.
지리산 자락자락, 죽고 죽이며 고통과 비명에 스러져간 무수한 삶이 있었다. 맺힌 한恨이 너무 커서 몸을 잃고서도 차마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숱한 영혼 가운데, 단 한 영가靈駕라도 나를 통해 전해지는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 마음의 원한을 풀고 참 극락을 수용해 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리라.
위패를 세우고 맑은 물을 담은 그릇을 불단佛壇에 올린다. 촛불에 닿은 향이 타오르는 반대편 끝을 쥐고 허공에 둥글게 원圓을 그어 향로에 꽂는다. 죽비가 알리는 시작. 경종과 더불어 울려 퍼지는 천도법문. 목탁 선율을 타고 불경을 읊는다. 오직 정성을 다할 뿐이다.
피로 물들었던 지리산에 오늘도 꽃은 피고 진다.
일념이 청정하면 숙업이 자멸하고, 상생상화相生相和하면 만복이 흥륭하리라. 한 풍랑이 일어나매 사해四海 물이 요란하더니, 한 풍랑이 그치매 천하가 안연하도다. 우리 마음도 또한 이와 같아서, 한 생각이 요란함에 모든 업이 뒤를 따르더니, 한 생각이 안연함에 천하 만방이 장차 부처님 세계로 화하여 일체중생이 다함께 부처님 세계에서 즐기리로다. 모든 영가여! 원망도 없고 시비도 없는 부처님의 참다운 세계를 알아 길이길이 참다운 극락을 수용할지어다. - 원불교 정산종사법어 1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