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동생이자 친구인 친구가 있다. (결국엔 친구인데, 인용하느라 언니라고 썼기에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서.)
친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어렴풋한데, 무엇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 였던 듯하다. 그런 와중에 내게 해맑게 저 말을 해주었는데,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가슴에 남아있다.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안 거니.
어떻게 그런 멋진 생각을 하고 살았니.
그 말을 듣고, 고모와의 대화가 스쳤다. 고모부가 은퇴하고 나이 들면 가까이 살면서 자주 찾아오라는 고모부께,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더라도, 서로 간의 적정한 거리가 필요한 것 같으니 1시간 거리에서 자주 찾아뵌다고 말씀드렸다. 부모와 자식도 그런 것 같다고. 적당한 거리가 건강한 관계를 만드는 것 같다는 말도 덧붙이며. 그랬더니, 고모는 내가 50이 넘어서야 깨달은 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셨다.
뱁새를 말한 그 친구에게 나는 같은 감정을 느꼈다.
나는 늘 황새인 채로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속도를 좋아했는데, 그래서 황새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조바심을 내왔고, 안정감을 잃어가며 그걸 옅게 희석시키느라 힘들었는데.
이 친구는, 너무도 해맑게 내게.
나는 원래부터 뱁새인 걸 알았어! 라니!
이런 나의 마음가짐이 내 삶을 힘들게 했노라 생각하니
하루가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가도 뱁새 생각뿐이다.
뱁새가 이렇게나 귀여운 걸.
여러분은 아시는지요.
뱁새는 뱁새 나름대로, 황새는 황새 나름대로의 삶이 있으니 모두가 행복하지요 호호, 라는 말은 하기 싫다. 그저 인정이다. 나는 뱁새였으나 황새이면 좋겠다고 착각했으니 괴리를 줄이려는 노력일 뿐.
저는 뱁새였습니다.
오늘 읽은 책,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겁이 난다는 사실이 겁이 나고 그 겁이 또 겁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루시는 여전히 겁이 나. 그러나 겁이 난다는 사실은 하나도 겁 안 나. 루시는 지금 아주 용감하게 겁이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