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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ohand Apr 10. 2016

출근길 단상

눈송이를 만들자

기차를 좋아하는 나인데도 아침마다 몸을 싣는 도쿄의 전차는 도통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한무리의 사람이 우르르 내린 자리를 더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빼곡히 채운다. 인파에 떠밀려 들어간 열차 안에서 손잡이를 잡지 않아도 서 있을 수 있는 상태가 되면, 마치 와플파이 기계에 담겨 꾹 눌린 밀가루 반죽이 된 기분이 든다. 다들 나처럼 참을 인 자를 되뇌이고 있겠지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그런데 누구 하나 표정이 일그러지는 사람 없다. 매일 보는 풍경이지만 참 신기하다. 겉으로 짜증내거나 한숨쉬거나 소리치는 사람 하나 없다. 실제로는 안그러겠지만 정말 힘들지 않은 건가 싶기도 하다. 대신 사람들은 손잡이 봉에 기댄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고, 손바닥 만한 문고판 책을 들고 읽으며, 이어폰을 꽂은 채 손잡이를 잡고 꿋꿋이 버티고 서 있다.



붐비는 전차 안에서 본의 아니게 일 센티의 간격도 없이 사람들 사이에 딱 붙어 서 있으면 주변을 가까이 관찰하게 된다. 주름살 깊게 패인 얼굴과 까치집이 된 뒤통수, 낡은 서류가방과 빳빳하게 접힌 와이셔츠. 그 속에서 반복되는 일상이 보인다. 알람을 못 듣고 늦게 일어나 헐래벌떡 집을 나선 신입사원의 아침이, 해진 가방끈을 어깨에 둘러매고 바삐 뛰어다녔을 영업사원의 노고가, 와이셔츠를 매만지는 중년 신사의 거친 손에서 그가 거쳤을 무수한 고민과 선택들이 보인다.



사람들이 각자의 경로를 따라 움직이고, 전차는 사람들의 수만큼 다양한 이야기들을 척척 실어 나른다. 그 기특한 풍경은 참 흥미롭다. 사람들은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게 짜인 거미줄을 닮은 자기만의 지름길을 따라 아침을 시작한다. 하나의 지름길로 다른 지름길은 정체되기도 하고 새로운 길이 되기도 한다. 어제는 운이 좋게 막 들어오는 열차를 탔는데, 오늘은 한발 차로 놓친다. 카드가 제대로 찍히지 않아 뒷사람이 2초 간 머뭇거려야 할 피해를 줄 때도 있고, 내가 손잡이를 잡은 탓에 옆사람은 불안하게 서 있어야 한다. 하필 내가 탄 열차가 폭설로 정차가 되 30분이나 갇혀 있을 때도 있다. 그렇게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 예상 가능한 경로 속에서 나타나고, 의도치 않았던 의도가 상대방에게 전해진다. 조금 더 뿌려넣은 고춧가루로 라멘의 느끼함이 줄어들 듯, 매일 조금씩 다른 아침과 아침이 만나 익숙하며 새로운 아침을 연다. 그런 하루가 반복된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같으면서도 조금씩 다르게.



어릴 적 아빠가 해주신 말씀을 기억한다. 눈송이는 모두 같은 모양인 듯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정 하나 하나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하셨다. 그리고 눈송이를 만들자 하셨다. 아빠가 말씀하신 의도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특별할 것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하루를 살아가는 태도에 관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이 하루를 넘어 삶 전체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반복되는 하루가 실은 그 자체로 특별하며, 그런 어제와 오늘이 쌓여 새로운 내일이 될 거라고.



그런데 요즘 붐비는 무리 속에 끼어 하루를 시작하며 다른 의미의 눈송이를 생각한다. 비슷한 양복을 입고 매일 같은 시간 출퇴근 하는 사람들이지만,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를 꾸려가고 있다. 사람 인 자가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이듯, 서로가 서로에게 어깨를 내어주고 또 동시에 기대고 있다. 나 역시 내 옆사람에게는 자신을 짓누르는 와플파이 기계일 것이다. 도쿄 사람들은 모두 그걸 아는 것 같다. 그래서 각자 서로를 응원하는 방식으로 힘겨운 출근길 아무런 내색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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