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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ohand Apr 21. 2016

데생과 사월의 공통점

행위를 넘어선 태도로서의 '보기'

    한동안 그림 앞을 떠나지 못했다. 사람들은 바로 옆에 모사된 최후의 만찬 앞에 몰려있었다. 그 바람에 인파에 밀려 가까이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붉은 종이 위에 붉은 선이 만드는 결들을 게슴츠레 뜬 눈으로 천천히 따라갔다. 적당히 구부러진 손목과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피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데생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제목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이 유다의 손인지 천사의 손인지 헷갈렸을 터였다.

    신들의 이야기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유다라는 인물이 갖는 배신자의 이미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선과 선이 반복되어 만들어진 형상 안에는 음산한 느낌이 감돌았다. 보아서는 안 되는 걸 보는 느낌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그 그림에 있었다.


    2년 전 그날 나는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있었다. 전화기를 붙들고 친구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게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다고. 신을 믿지 않는 친구는 내게 신이 있다면 어찌 이럴 수 있는 거냐 말했다. 신을 믿는 친구는 많은 이들이 기도를 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희망을 본다고 했다. 일주일 전 엄마가 학생들과 함께 건너온 그 바다였다. 어디선가 시큼한 철 냄새가 나는 듯 했다. 나는 핸드폰 속 달력을 자꾸만 들여다보았다.     


    마주하는 것조차 힘든 일들이 겹겹이 쌓이는 4월. 사람들은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굿도 하고 영화도 만들며 추모와 애도를 한다. 메시지는 모두 같다. 기억하자. 나는 똑바로 기억하고 싶었다. 진실과 사실이란 이름으로 여기저기 널브러진 조각들 중 제대로 된 것 한두 개라도 주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매개체를 통해 사건을 바라볼 수 없는 상황에서, 다른 장르들보다 덜 가공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진실과 사실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도구였다.


    자신이 ‘유가족-층민’이라며 쓴웃음을 짓는 아버지, 그동안 세상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고 아이들이 세상을 가르쳐주나보아요, 라고 말하는 어머니, 햇빛을 가리는 양산을 쇠파이프로 오해한 전경들에게 둘러싸이는 해프닝 모두 카메라에 담겨있었다. 그 장면들이 너무나 날 것이어서 탈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정부와 관계자들에 마음이 베이고 찢기고 무너져 내리면서도 상대방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했다. 발단-전개-절정이 반복되는 와중에 결말을 마주하는 할 때까지 끝까지 보려 했다. 제대로 된 조각들은 진실 혹은 사실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보기를 멈추지 않으려는 태도에 있었다. 그 태도를 상실한 나라는 영화 제목처럼 참으로 ‘나쁜 나라’다.


    본다는 행위는 참으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그 자체로 힘이 있으며 아름답다. 자세히 보아야 하는 것이 기본 조건인 데생. 레오나르도가 그린 유다의 손에는 그러한 관찰력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쉽게 외면하고 마는 존재를 알려는 기꺼운 마음, 오해에서 이해로 나아가려는 태도. 아마 나는 거기에 매료되었으리라. 모두에게 그렇듯 나에게도 슬픈 이 4월에 새삼스럽게 그 그림이 떠오르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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