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스물일곱 백수보고서
이 글은 2009년에 작성되어 2019년에 발행된 글입니다.
몇 해 전, 우석훈 박사는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통해 몽매한 대한민국 20대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 한 권의 책-‘절망의 시대를 살아 내는 대한민국 20대에 관한 보고서’ 쯤으로 제목에 각주를 달아주고픈- 이 불러온 반향은 가히 대단했던 것 같다. 사회과학서로는 드물게 10만 부 이상 판매고를 올렸다는 언론보도는 차치하더라도, 출간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88만원 세대’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인구에 회자되는 걸 보면 말이다.
어찌 됐건, 우석훈 박사의 예리한 통찰력과 기똥찬 작명 솜씨 덕분에 ‘잃어버린 세대’였던 한국의 20대 집단은 비로소 걸맞은 이름을 얻게 됐다. 비록 ‘88만원 세대’라는 조금은 우중충하고, 시니컬한 꼬리표이지만. 애당초 취업 따위엔 관심 없던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어느 틈에 나는 이 새로운 경제 집단의 카테고리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세상은 곧 그 이름으로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렀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우석훈 박사는 88만원 세대에게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언론은 노암 촘스키를 운운하며 20대의 대변인이 되어 포스트 신자유주의의 나팔수 역할을 한 그를 치켜세우기 바빴다. 연이어 각계에서 MB정부의 각성과 실질적 고용대책을 요구하는 의견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뭐, 하지만 그뿐이었다. 우석훈이 아니라 우석훈 할아비라도 하루 아침에 20대를 불행의 심연에서 구할 수는 없는 거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즈음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한국의 20대는 취업전쟁에 시달리고 있고, 나 같은 어중이떠중이는 경제활동인구와 비경제활동인구 경계 주변을 이리저리 부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개인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영 없는 것은 아니다. 사라진 것이 제법 많다. 오랫동안 간직해온 꿈이 사라졌고, 장밋빛 드리운 스무일곱의 겨울이 사라졌고, 훌쩍 떠나고 싶었던 네팔 여행이 사라졌고, 몇 푼 없던 통장 잔고가 송두리째 사라졌다. 얻은 것도 조금 있다.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다는 냉소주의적 회의와, 허벅지와 배 둘레를 에워싼 체지방 4kg, 그리고 전기장판에 오른쪽 볼을 부빈 채 고르게 숨만 쉬어대도 비난받지 않는 무력한 시간들을 덤으로 얻었다.
며칠 전, 만 26세가 되는 생일을 맞아 국가는 ‘너는 일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변변찮은 일자리가 없으니 국민연금을 납부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대신 네 노후는 책임 못 진다’라는 식의 통지서 한 장을 내게 보내어 왔다. 정부가 친히 앞장서 빛바랜 내 경제 좌표의 (x, y)를 명확히 점찍어 준 덕분에 다시 한번 발밑을 바라보게 되었다. 가방끈이 긴 것도 아니고, 별다른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느 틈에 나는 더 이상 상큼하지도, 발랄하지도 않은 20대의 끝자락에 서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어중간한 학벌과 교육자 양친을 둔 ‘돈은 없지만 그럭저럭 봐줄 만한 집 자식’이라는 허울, 조금 애쓴듯한 영어 성적표뿐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온 결과라기에는 너무도 초라하고 볼품없다.
어느 경제학자의 표현을 빌려와 그럴듯하게 사회경제학적으로 분석해 보자면, 나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가장 ‘약한 고리’인 20대의 여성 실업자이며, 방구석에 틀어박혀 부모에게 기생하며 살아가는 니트(NEET)족인 셈이다. 조금 정치적으로 혹은 좌파적으로 돌려서 말해보자면, 무한상승을 꿈꾸는 계급 사다리 하단의 어느 즈음에 간신히 매달려있는 ‘투명 인간’ 같은 것이리라. 지금 당장 무어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 당장 변하지 않으면, 나라는 존재는 시간이 갈수록 희석되고 옅어져 종국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무언가를 해야 한다. 원점으로 돌아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기다려도 세상은 변치 않으니, 이제는 내가, 내가 변할 차례다.
덧.
다짜고짜 처지를 주저리주저리 읊어댄 것은 넋두리를 늘어놓자는 것도 아니요, 그리하여 모종의 동정심을 유발해보자는 심산도 아니다. 단지 내 나름대로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마주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확언컨대, 더 이상 나는 10대나 20대 초반 무렵 자위하듯 탐닉하던 왜곡된 자아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남들이 보는 나, 세상이 보는 나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기 바란다. 이 글을 읽는 몇몇은 그런 내 노력마저 부인하고 있음을 잘 알기에 이런 식으로나마 증명해 보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2019년의 회고]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당장 뭘 먹고살아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도 더 삐딱하게 돌아서 있었기에, 날 선 말과 모진 글로 세상의 모든 것을 향해 공세를 퍼붓기에 급급했다. 알량한 자존심을 지켜내고자한 치기어린 선택이라기엔, 나름 결연한 태도로 살아냈던 2009년. 주변 모든 사람과 세상의 불공평함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도서관에서 지적 해갈을 구하던 시기. 힘들었던 시기지만, 아마 이 시기가 없었다면 지금 나를 지탱하는 여유도, 또 베짱도 얻지 못했을 거다. 이제 시간이 흘러, 88만원 세대가 아닌 [90년생]이 세상의 한 가운데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당시의 나처럼 방황하고 있을 그들에게 힘내라는 응원의 한마디를 건네며, 그 지친 어깨를 다독이고 싶다. "힘든 시기는 또 그렇게 흘러가고, 아픈 만큼 성숙하고 단단해지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