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피서, 한 여름 무더위를 피해 가는 휴가. 국어사전에 정의된 ‘피서’다.
피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바다다. 하지만, 정작 바다는 생각만큼 시원하지 않고, 오히려 뜨겁다. 태양을 피할 곳 없이, 뜨거운 태양을 온전히 즐겨야 한다.
바다는 열정적인 여름을 즐기러 가는 곳이지, 더위를 피하러 가는 곳은 아닌 것 같다. 더위를 피하려면, 오히려 시원한 그늘과 신선한 바람이 있는 숲이나 산으로 가는 것이 낫다.
그렇다고 바쁜 일상에 매번 설악산이나 오대산 같은 명산에 갈 수는 없으니, 틈틈이 걷기 좋은 서울의 숲길을 찾아 나선다. 봉산 숲길은 그렇게 찾아낸 걷기 좋은 서울 숲길 중 하나다.
높이 약 200 미터의 봉산은 서울 은평구와 경기도 고양시의 경계에 있다.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봉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봉산 숲길은 은평 둘레길의 한 코스로 은평구 증산로 삼신아파트 입구에서 시작된다.
6호선 디지털 미디어시티역 5번 출구로 나오면, 삼신아파트 방면으로 나갈 수 있는데, 주택가 골목이 복잡하여 봉산 숲길 입구인 삼신아파트 입구까지 찾아가는 여정이 좀 복잡하다. 휴대폰 내비게이션까지 동원해서야 비로소 봉산 숲길 입구에 이를 수 있었다.
삼신 아파트와 청구 아파트 사잇길에 봉산 숲길 입구가 있는데, 아파트 단지를 옆에 두고, 나무 계단으로 이어진 언덕을 오르면, 어느새 아파트 단지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호젓한 숲길이 이어진다. 한 순간에 복잡한 도시의 일상에서 피서지로 옮겨간 느낌이다.
다양한 종의 나무들이 얽히고설켜 완벽한 그늘을 이루고, 곳곳에 피어난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나를 맞이한다. 숲의 환대 속에 완만한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솔마당’이라 이름 붙여진 소나무 숲이 나타난다. 조금 전까지 드문 드문 보이던 소나무가 이 한 곳에 군락지를 이루고,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소나무 숲의 바닥에 누워 있으니, 솔내음 가득한 솔바람이 한가득 밀려온다. 피톤치드가 온몸의 숨구멍을 통해 스며들어 내 몸을 정화시키는 듯했다. 봉산 숲길에서 만난 솔마당은 잠시지만, 나에게 완벽한 휴식을 주었다.
도시의 지친 삶에서 묻은 떼와 먼지들, 다 깨끗이 씻어내라며, 끊임없이 솔바람을 보내주었다.
그렇게 솔마당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숲이 우거진 산책로를 걷다 보면, 조금 지루해질 때 즈음 팥배나무 군락지가 나타난다.
팥알 모양의 열매가 맺힌다고 하여 이름 지어진 “팥배나무”는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마사토양에서 생육하는 대표적인 자생수목이다. 팥배나무는 대규모 군집을 형성하는 경우가 매우 드문데, 이 곳 봉산의 팥배나무 군락지는 서울 지역의 다른 군락지들에 비해 대규모로 형성되어 있어 그 희소성과 보존 가치가 높다고 한다.
나무 펜스로 이어진 탐방로를 따라 걸으며, 하늘로 쭉쭉 뻗어 올라 간 팥배나무의 줄기들을 보고 있으니, 바람이 없어도 시원한 느낌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아직 철이 되지 않아 팥알 모양의 빨간 열매는 볼 수 없었다는 것. 열매는 가을에 볼 수 있다니, 그때 즈음 봉산 숲길을 다시 걸어봐야겠다.
탐방로를 따라 팥배나무 군락지를 지나고 나면, 이제 봉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가 이어진다. 좀 길고 지루한 코스다.
아직 공기가 시원했던 오전 9시경 시작했던 하이킹도 이제 11시에 가까워지면서 조금씩 열기가 달아오른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한걸음, 한 걸음 오르니, 봉산 숲길 입구에서부터 약 2시간이 걸려 봉산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봉산 정상은 그야말로 그늘 하나 없는 뙤약볕.
정상에서 뙤약볕을 피할 수 있는 곳은 ‘봉산정’이라 이름 붙여진 작은 정자 외에는 없었고, 평평하게 다져진 너른 광장에 봉수대 2기가 외로이 서 있을 뿐이었다. 정상에 오르며, 달아오른 열기가 식힐 곳 없이 내 안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봉수대 옆에 서울 전망을 내려다볼 수 있는 포토존이 있었으나, 요즘 어느 정상에 올라가 보아도 미세먼지 때문에 뿌연 하늘밖에 보이질 않으니, 봉산 또한 기대와 다르지 않았다.
약간 실망했지만, 3.1 운동 당시 동네 주민들이 모여 횃불을 들었던 역사적인 장소라고 하니, 그 역사적 의미로 실망감을 대신해야 할 것 같다.
뜨거운 태양볕 때문에 봉산 정상에 오래 머무르지는 못하고, 걸음을 재촉하여 정상을 내려왔다. 다시 호젓한 숲길을 걸어 피톤치드를 흡입하며, 1시간 여 걸어내려 오면, 수국사 방면으로 내려와 봉산 숲길이 끝나게 된다.
산은 생각보다 우리 일상에서 멀어 보이지만, 숲은 생각보다 우리 일상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높은 명산은 아니지만, 일상의 틈틈이 주변의 얕은 산이나 숲길을 찾아서 걸어보면 어떨까?
서울 전체를 덮어버린 무더위와 미세먼지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청량하고 맑은 숲이 있다. 그리고, 숲길을 걸으면, 무엇보다 기분이 좋아진다.
(글/사진) Tripp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