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변했어도 강산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종종 아무 생각 없이 서촌의 골목을 헤매듯 걷곤 한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서촌은 아직 특별하고, 목적 없이 지나치는 이방인을 받아 줄 만큼 아직 정감 있다.
아직 아련한 옛 느낌이 남아 있는 서촌의 골목을 걷다 보면, 어느새 그 골목의 막다른 끝에서 수성동 계곡을 만나게 된다.
현재는 종로구 옥인동에 속하는 인왕산 능선 아래 수성동은 계곡의 물소리가 맑다 하여 조선시대에 “水聲洞”이라 불렸다. 조선시대의 명승지였던 수성동 계곡은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라는 작품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휴양지였던 수성동 계곡 일대는 낡은 아파트와 빌라촌 주변으로 새로 지은 빌라와 옛 한옥집이 조화를 이루며, 새로 생긴 카페와 상점들로 골목골목마다 새로이 재해석되고 있는 중이다.
그 골목의 끝에 위치한 수성동 계곡은 이러한 서촌의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선시대 겸재가 그렸던 그 모습 그대로 아직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수성동 계곡의 입구에 서면, 겸재 정선이 그렸던 “수성동”이라는 작품과 동일한 풍경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수백 년 전 겸재가 서 있던 자리에 내가 서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시공을 초월한 동질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런 동질감 속에 수성동 계곡의 주변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옛 선비들과 조우하게 될 것 같은 신비로운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산책로가 약간 정비되었다는 것 외에 수성동 계곡의 풍경은 변한 것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렇게, 옛 선비들이 거닐었던 수성동 계곡의 물줄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금세 청계천의 발원지를 만나게 된다.
현재는 수성동 계곡에서 청계천까지 이어지는 물길이 끊겨 있지만, 원래는 수성동 계곡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청계천을 지나 한강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곳에는 아직 도롱뇽이 산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도롱뇽은 1 급수에만 서식한다.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은 계곡에 도롱뇽이 산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주변 환경은 많이 변화했지만, 아직 수성동 계곡은 겸재의 화폭에 담겼던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남아 있고, 도롱뇽 또한, 계속 살아가고 있다.
이 곳, 수성동 일대는 그렇게 조선시대와 대한민국이 공존한다. 서울은 변했어도 강산은 여전히 그대로다. 그렇게 여전히 변함없는 수성동 계곡의 발원지를 지나 언덕을 오르면, 인왕산 자락길로 이어진다. 아직 봄의 싱그러움이 남아 있었던 인왕산 자락길을 따라 부암동까지 걸어가 본다.
나의 서촌 방황은 늘 그렇게 수성동 계곡을 지나 부암동으로 끝나곤 했다. 서촌에서, 수성동 계곡, 그리고 부암동까지, 약간씩 다르지만, 어딘지 모르게 통하는 느낌이 있다. 나는 그 느낌에 이끌려 늘 그곳을 방황한다.
스치듯, 헤매는 여행자. 아니, 여행자가 아니어도 여행자가 될 수 있는, 공간의 이동이 아닌 시간의 이동이 있는 여행.
수성동 계곡은 우리 주변에 얼마 남지 않은 도심 속 명승지로 남아 있다. 앞으로 수백 년 후에 우리 후손들 또한, 그곳에 서서 우리 세대의 발자취를 추억하고 있으면 좋겠다.
(글/사진) Tripp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