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게이샤 커피와 만남

게이샤 커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러시아 커피잔에 담긴 게이샤 커피



 2008년 4월 어느 날, 커피 생두를 수입하는 업체에서 커핑 모임이 있다는 연락이 왔다. 확인해 보니, 세상에 처음 소개된 게이샤 커피를 맛보는 자리였다. 나는 귀한 커피를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떠서 하던 일을 미루고 서울로 향했다. 장소는 여의도의 작은 커피점. 모이기로 한 그날, 윤중로에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커피점까지 가는 길, 공기가 맑고 상쾌했다. 오늘의 커피 맛도 이런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커피 업계의 지인들과 인사를 나눈 후, 주최 측의 설명이 이어졌다. 커피 전문가들도 게이샤 커피를 처음 만나는 시간이었다. 게이샤 커피에 대한 설명과 커핑을 주최하게 된 경위를 듣고 노고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도 스페셜티 커피의 수요가 점차 늘면서 세계 스페셜티 커피 옥션에 직접 참가할 정도의 역량이 생겼다는 주최자의 설명에 가슴이 뭉클했다. 커피 공부를 하면서 외국의 커피 세미나에 참석할 때마다, 그들은 마치 스페셜티 커피가 자신들의 점유물인 것처럼 자랑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부럽기만 했었다. 오랜 세월, 맛있는 커피를 찾아 해외를 방황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나에겐 오늘의 모임이 더 특별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듯 동경하던 상상 속의 커피를 만나는 자리였기에.



  이 일을 추진한 업체는 벌써 옥션에 등록하고 파나마 에스메랄다(Hacienda La Esmeralda) 농장에서 보내준 게이샤 커피 샘플 10여 종을 받아 로스팅해놓고 있었다. 똑같은 게이샤 커피였지만 배치(Batch) 별로 수확 시기가 모두 달랐다. 같은 농장에서 생산되었지만, 수확 시점에 따라 맛이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설명에 게이샤 커피 맛이 더 궁금했다. 커핑은 절차에 따라 시작되었다. 1번 샘플의 첫 모금은 최고급 향수를 마신 듯, 은은한 꽃향기를 간직한 게이샤 향이 입안과 후두부로 퍼져 나갔다. 정녕 이것이 커피란 말인가? 두 모금, 세 모금 더해질수록 나는 게이샤에 매료되었다. 점점, 게이샤가 이끄는 맛과 향기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우리가 말하던 환상적인 맛이 이런 것인가? 농익은 감귤의 달콤함과 상큼한 신맛, 그것은 레몬의 신맛처럼 강하지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절제미를 갖추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맛의 변화였다. 감미로운 여운을 입안에 남긴 채, 상큼하고 부드러운 신맛은 퍼지는 향기에 슬며시 자리를 내어주며 안개처럼 사라졌다. 마치 사랑을 나눈 후 머문 자리에 채취만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는 ‘게이샤 (げいしゃ : 藝者)’의 숙명처럼, 게이샤는 달콤한 꿀 향의 기억을 남기면서 나에게 슬픔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게이샤는 그렇게 떠나지 않았다. 혀끝 미봉에 남은 감미로운 향기가 교태스러운 게이샤처럼 미각 세포를 자극하고 있었다. ‘아, 나는 어떡하나!’ 운명처럼 만난 게이샤. 점점 깊은 사랑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니 하룻밤도 아닌, 한 모금의 유혹에 나는 구속되어 버렸다. 꿈에서 벗어나려고 감았던 눈을 뜨자, 후두로 밀려온 게이샤 특유의 재스민 꽃향기가 단 향과 더불어 코끝에 아직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느껴지는 향기들. 블루베리의 향일까? 아니, 송로버섯의 향기? 나의 상상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복합되고 혼재된 채 퍼지는 수많은 향기를 나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다. 부족한 향기의 지식으로 게이샤 커피의 오묘한 향기를 말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단 한 번의 입맞춤에 나는 포로가 되었다. 그날, 나는 나의 커피 인생에 게이샤를 동반자로 함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맛있는 커피를 찾아 정처 없이 방황했던 보헤미안 같은 삶의 시간 모두가 게이샤를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다. 이렇게 나의 게이샤 사랑은 시작되었다.



 커핑은 예정대로 잘 진행되었다. 모임의 참석자는 대부분 커피전문점을 운영하는 대표들이어서 빠른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작은 힘이지만 서로 협력해서 5월 22일 열리는 ‘2008년 게이샤 커피’ 옥션에 직접 참가를 결정했다. 2008년 5월 23일 오전. 흥분된 목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들려왔다. 방금 끝난 옥션에서 우리 팀이 3개 롯트를 경락받았다는 희소식이었다. 가격도 적정하게 받았고 최고 품질의 게이샤 커피였다. 더군다나, 세계 커피 업계의 큰손들이 즐비한 옥션에서 미국, 독일, 일본 등, 세계 900여 대형업체들과 경쟁해서 차지한 우리의 몫이어서 자랑스러웠다. 그 후, 달 반이 지나 항공편으로 파나마에서 게이샤 커피가 도착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진공포장을 풀어 풋풋한 내음의 커피생두를 계량해 커피 로스터에 투입했다. 회전하는 드럼을 달군 가스 불 열기는 깊은 잠을 자는 게이샤 커피를 깨웠고, 게이샤는 성장한 토양의 기억을 떠올려 파나마 바루 화산의 풍미 가득한 커피 향기로 그 모습이 변해갔다.




참고.

 게이샤 커피는 2004년 베스트 오브 파나마 경연에서 1등을 차지하면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게이샤라는 이름에 걸맞게 세계 커피 인을 깜짝 놀라게 한 그 커피는 연이어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세계 커피 경연에서 모두 1등의 자리를 휩쓸었다. 그리고 세계 스페셜티 커피협회 주최로 세계 최고의 커피를 선발하는 스페셜티 커핑 박람회에서도 2005년, 2006년, 2007년 모두 1등을 차지했다. 이렇게 게이샤 커피는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되어 세상에 나타났지만, 판매가 가능할 정도로 생산되지 않았다. 2008년부터 파나마 에스메랄다 농장에서 상업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세계 최초로 게이샤 커피 옥션을 시행했다. 이 옥션에서 필자가 참여한 한국팀이 2008년 5월 22일 에스메랄다 게이샤 커피를 경매로 낙찰받았다. 이때부터 게이샤 커피는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매년 시행하는 공개 옥션으로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글/사진: 대구 남산골 커피쟁이 이병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