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커피의 전설, ‘세키구치 이치로’(2편)
일본의 다방과 카페
전후(戰後), 일본은 한국전쟁으로 경제가 좋아지면서 다방이 성업했다. 다방 붐의 영향으로 1980년대에 약 15만 개 정도의 다방이 있었다. 2000년이 지나면서 7만 개 정도로 줄었다. 그럼, 당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작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그 여파는 일본 커피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1980년 4월, 도쿄 하라주쿠 역 앞에 도토루 커피(DOUTOR)가 카페 1호점을 개업했다. 그 흔하디 흔한 커피점 오픈이 뭐 대단한 사건이라고? 그렇다.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도토루 카페는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이었다. 그 여파는 실로 컸다. 도토루 카페는 1971년 미국 시애틀에서 시작한 스타벅스 스타일을 모방한 커피점으로, 영업 방식이 기존의 다방과는 달리 손님이 직접 주문하고 음료를 가져가는 셀프서비스 방식이었다. 일본의 다방은 여성 종업원이 테이블 서비스하는 찻집 형태였기에 당시에는 큰 화젯거리였다. 이렇게 셀프서비스를 앞세운 도토루 커피가 선두주자로 나서면서 찻집은 술렁거렸다. 변화의 신호탄이 된 듯, 새로 오픈하는 커피점 대부분은 카페 스타일이었다. 유행에 앞선 이들이 카페로 몰렸고 기존 다방은 영향을 받았다. 반면, 도토루 카페는 프랜차이즈로 급성장하면서 도쿄증권거래소 1부에 상장까지 했다. 이때가 2000년이었다. 이렇게 일본에 셀프서비스 카페가 유행되자, 원조인 미국의 스타벅스 커피가 1996년 8월 일본 1호점을 긴자에 열었다. 뒤이어, 타리즈 커피(TULLYS)도 1998년 신주쿠에 점포를 냈다.
정체성
이런 변화 속에서 카페 드 란브르는 7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묵묵히 긴자의 뒷골목을 지켰다. 그것도 개업 당시의 모습을 유지한 채로. 그 비결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커피점을 시작할 때 내 걸었던 슬로건이다. 지금도 란브르 입구 벽에 붙어 있는 하얀색 아크릴 간판의 영문 글씨. 비록 단어 몇 개에 불과하지만 란브르와 이치로 씨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COFFEE ONLY, PERFECT, OWN ROAST, HAND DRIP’‘커피만 팝니다. 완벽한 커피, 자가 로스팅, 핸드드립 커피’라고 말하는 이치로 씨의 커피. 비록, 그가 고객에 내놓는 것은 150cc 남짓한 커피 한잔이지만, 그 속엔 이치로 씨가 이룬 평생의 기술과 집념이 담겨있다. 그래서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내 건 슬로건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이치로 커피는 이런 거야?”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치로 커피를 마시러 갈 때마다 그의 커피 철학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궁금했다. 와세다 대학의 공학도인 그가, 언제 어디서 커피를 만나게 되었는지 등등. 호랑이를 잡으려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듯, 필자는 이치로 씨의 흔적을 찾아 수시로 그의 공간에 드나들었다. 하여, 오늘은 그의 에피소드 중, 대학 시절에 커피를 경험하면서 배워가는 과정의 이야기다.
커피 맛에 홀린 학생
그의 젊은 시절 커피 이야기는 태평양전쟁 이전으로 거슬러 간다. 당시에 도쿄 긴자 8번가(8丁目) 가로수 길에는 이름난 다방, 고이치로(耕一路) 커피점이 있었다. 어느 날, 대학생 3명이 다방 한구석 의자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각자 33전의 동전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커피를 기다렸는데, 이 다방의 커피값이 한 잔에 1엔이었다. 그 시절 물가로 보면 정말 비싼 커피였다. 지금과 비교해 보면, 당시 골든 밧(GOLDEN BAT) 담배 1갑이 7전, 소바 한 그릇이 10전이었으니 커피 한 잔에 1엔은 대학생들로선 접근하기 어려운 돈이었다. 그래서 이치로 씨는 고이치로 커피를 마시려고 친구 2명을 꾀어 1엔을 마련했다. 어렵게 모은 돈이지만 한 잔 값밖에 안 되는 금액. 이치로 씨는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그는 주인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했다. 커피를 공부하는 학생들인데 맛있는 커피를 경험하고 싶어 어렵게 1엔을 모았다고 했다. 상황을 파악한 주인은 그들에게 커피 한 잔을 3잔으로 나누어 주었다.
패배를 안겨 준 첫 커피
이치로 씨가 대학생이 되면서 긴자의 다방을 출입하기 시작했다. 그도 다방에 처음 갔을 때는 커피를 몰랐기에 우유를 주문했다. 그 후, 다방 음료를 이것저것 다 마셔보고 제일 맛있는 음료가 커피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맛있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멀어도 커피점이 많은 긴자를 찾았다. 그런데 밤새워 시험공부할 때는 다방 문이 닫혀서 커피를 마실 수 없었다. 그는 커피를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커피 도구를 준비해서 만들었는데 생각처럼 커피 맛이 좋지 않았다. 그의 생각엔 같은 커핀데 파는 커피와 왜 맛이 다른지 궁금했다. 떠오르는 의문과 자신의 첫 도전에 패배를 안겨 준 커피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공학도였기에, 맛없는 커피의 원인을 찾아 나섰다. 호기심과 탐구심이 많은 그였기에, 실패는 오히려 동기부여가 됐다. 이때부터 커피는 이치로 씨의 연구 대상이었고, 커피 세계에 점점 빠져들었다.
그런데 커피 연구를 어디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궁리 끝에 맛있는 커피집을 찾아가서 커피 만드는 과정을 엿보기로 했다. 한 커피점에 가서 커피를 주문하고 종업원의 행동을 유심히 봤는데, 주문을 받은 종업원이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에 커피콩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 소리를 듣고 ‘아! 그렇다. 커피는 마시기 전에 콩을 갈아 만들어야 하는구나!’라고. 그는 그동안 갈아 놓은 커피를 사서 커피를 만들었다. 그래서 커피가 신선하지 않고 산패되어 맛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치로 씨는 이 정도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꾀를 냈다. 맛있다고 소문난 다방을 정해놓고 갈 때마다 책임자에게 선물 공세를 했다. 출입 횟수가 늘면서 다방 종업원들과 점점 친해지자, 그는 책임자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말했다. “사실, 저는 커피가 좋아 혼자 커피를 만들었는데 맛이 없어서 마실 수 없었어요. 맛있는 커피 만드는 법 좀 가르쳐주세요. 꼭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이치로 씨는 이렇게 부탁하면서도 반신반의했다. 제대로 알려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책임자는 흔쾌히 자신이 일하는 공간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치로 씨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소문난 또 다른 다방을 찾아가 부탁했는데 그곳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커피의 스승, 미우라 요시다케
그는 점점 더 커피에 빠져들었다. 니혼바시(日本橋)에 있는 백화점 시로키야(白木屋) 7층에는 1년에 1〜2회 커피를 즐기는 모임이 있었는데, 회원제로 운영했다. 그 모임의 주최자는 당시 최고의 커피를 만드는 미우라 요시다케(三浦義武) 씨. 그가 즉석에서 융으로 추출한 커피를 마시는 모임인데 회비는 2엔이었다. 당시 물가로 보면 큰 금액이어서 재정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만 참석했다. 그런데 학생 신분으로 유일하게 이치로 씨가 참석했다. 그가 커피를 볶기 위해 커피 수입업체를 찾아다니다 알게 된 스미다 물산(スミダ 物産)이 있었다. 그곳에서 커피에 진심인 그를 보고 이치로 씨를 미우라 요시다케 씨에게 소개해주었다. 스미다 물산은 ‘커피를 공부하는 대학생이니까, 여러 가지로 잘 돌봐 주세요.’라고 요시다케 씨에게 부탁했다. 미우라 요시다케 씨는 커피에 미친 이치로 씨의 모습을 한눈에 알아보고 학생 신분인데도 그를 모임에 불렀다. 이치로는 이렇게 미우라 요시다케 씨에게 커피를 배웠다. 공학도인 이치로 씨가 스스로 연구해서 커피 지식을 쌓아 갔다고 생각하지만, 미우라 요시다케 씨의 도움이 컸다.
와세다 대학의 공학도
세키구치 이치로 씨는 1914년 5월 26일에 태어나 와세다 대학 이공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부터 커피의 매력에 빠져 커피를 연구한 그였지만, 졸업 후에는 전공과 관련된 음향 일을 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그 이듬해 이치로 씨는 군대소집 영장을 받았다. 그가 이공학부를 전공한 엔지니어였기에 일본수도방위사령부 고사포부대의 무기수리반에 배치되어 다양한 무기 수리와 보수를 담당했다. 그가 배속된 부대는 지금 도쿄돔 야구장이 있는 고라쿠엔(後楽園) 지역이어서 미군의 도쿄 대공습 때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한 번은 불시착한 B29 비행기 조사에 입회한 적이 있었는데, 미군들에게 지급된 도시락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 안에 인스턴트커피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전쟁하는 중에도 커피를 마시도록 군인의 도시락에 커피를 넣어 주는 나라 미국. 그 배려와 여유를 가진 미국을 상대로 일본이 전쟁한다는 것은 승산 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같은 부대의 전우 건물에서 친한 전우들과 교에이사(響映社)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하는 일은 영화관에 공출하고 남은 고장 난 영사기를 수리하고, 음향시설을 위한 앰프를 만들었다. 회사가 잘되어 매출도 많았는데 동료의 배신으로 빚만 남긴 채 문을 닫았다. 그 후, 그는 사진 촬영용 스트로브를 연구해서 만들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33세로 카페 드 란브르 개업 1년 전이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카페, 란브르와 세키구치 이치로의 이야기 (1) 편’에 있다.
글. 이병규 / 건축사 (T. 010-3534-5334)
- 대구 남산골에서 ‘이병규의 커피클럽’을 운영하면서 커피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