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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Nov 04. 2017

루프탑을 원해요

걸어서 오 분 거리에 사는 동생은 별 일 없는 아침, 조카를 데리고 우리집으로 출근한다. 자신의 어릴 적 상처 때문에 아이는 엄마가 봐줬으면 좋겠다는 제부 덕에, 우리 가족 중 누구도 어린이집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조카는 네 살이 된 지금도 어린이집에 다니지 않는다. 우리집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이모와 재미있게 하루를 보낸다.


"어딨어?"

"밑에 집이지."

"이따 너네 집에 놀러 갈 건데. 언제 올라가?"

"글쎄."


윗동네에 사는 동생네 집은 '윗집'. 아랫동네에 사는 우리집은 '밑에 집'. 요 며칠, 조카가 아팠다. 아픈 조카를 따라다니느라 동생과 제부는 집을 치울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내가 집에 놀러 간다고 했으니. 하지만 동생은 당황하지 않는다. 내가 조카와 놀고 있으면 동생은 이불 빨래를 처리하겠단다. 오케이.


조카와 노는 건 참 재밌다. 식탐이 많은 나는 맛있는 걸 같이 맛있게 먹어줄 사람을 좋아하는데, 우리집에서 유일하게 그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게 조카다. (다들 위가 작다.) 조카가 많이 먹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음식을 앞에 둔 자의 치열함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조카의 그런 치열함이 마음에 든다.


"윌 유 고우 투 더 루프탑?"

"???"

"나가자."

"싫은데. 집에 있을 건데."


이리저리 청소하느라 바쁜 동생에게는 미안하지만, 몇 시간 집에 머물다 보니 집안 공기가 답답하다. 조카를 데리고 나가고 싶어 친절하게 의견을 물었는데 조카는 싫단다. 억지로 옷을 입히고 양말을 신기고 밖으로 나갔다. 비타민B가 부족하면 안 된단 말이다. 


"옥상이다!!!"


아하, 루프탑이 아니라 옥상이지. 언제부터 루프탑이라고 했다고. 애초에 조카에게 옥상에 올라가자고 했어야 했다. 루프탑이 뭐야, 촌시럽게. 옥상에 올라온 조카는 제일 먼저 동 주민이 키우는 화분으로 갔다. 우리는 화분 주변을 빙빙 돌며 말도 안 되는 노래를 불렀다. 조카가 앞에서 뛰면 나는 뒤에서 뛰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뛰었다.


"올라가고 싶어."

"어딜?"

"여기."

"위험해."


조카에게 늘 미안한 말. "위험해", "안 돼" 같은 말. 조카의 예민함을 더욱 자극시키는 말. 되도록이면 하고 싶지 않지만 결국은 하고 마는 말. 


"그럼 여기 올라가자."

"좋아."


조카를 에어컨 실외기 위에 올려주었다.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조카가 다니기 싫다던, 그 어린이집 놀이터에서 소리치며 노는 아이들, 고구마를 캐는 아저씨의 엉덩이, 비가 올 듯한 구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옛날이야기에 푹 빠진 조카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며 마을을 하나하나 살폈다. 옥상 바닥을 청소하는 빗자루는 마녀의 빗자루로, 이름 모를 벌레는 옥상에서의 탈출을 꿈꾸는 히어로로, 아저씨들의 바베큐장은 해적의 배로 변신한다. 참으로 다종 다양한 사람이 사는 마을이구나. 내가 매일 만나는 마을은 정말 얼마 안 되는구나.


"이모 이제 호호아줌마 가야 하는데, 내일 또 올까?"

"호호아줌마? 더 놀고 싶은데..."


조카가 마음껏 놀고 싶게 해주고 싶은데. 나는, 우리 가족은, 늘 조카보다는 자신의 스케줄이 먼저인 듯하다. 어린이집에 안 다니는 어린이는, 돈벌이를 하지 않는 어린이는, 돈벌이를 하는 어른에게, 자신에게 많은 것을 희생하는 어른에게 뭔가를 양보해야 하는 건가. 


해가 지면 마녀가 돌아오니까 우린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며, 아쉬워하는 조카를 안고 옥상을 나왔다. 조금 더 놀고 싶어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조카의 눈길을 뒤로하고 호호아줌마로 갔다. 이렇게 착하고 맑은 눈을 한 아이에게 고집을 부린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 한다고 말하기는 참 힘들다. 하지만 나는 조카에게 왜 고집을 부리느냐고, 왜 상대를 배려하지 않느냐고 소리친다. 조카에게 할 소리가 아닌 소리를 조카에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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