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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문수 Aug 19. 2021

굿바이 3

Lost my mind

소원의 옆에 기대섰다. 순간을 숨 쉬게 해주는 한 모금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수명을 단축한다. 고등학교 때 잠깐 피우다 끊었다. 입대 전날 밤, 동갑내기 전 여자 친구의 약혼 소식을 들은 다음 날. 몇 번 더 피웠던 것 같기도 하다. 상훈은 소원의 왼쪽 손에 들려있는 말보로 담뱃갑에서 한 가치를 빼서 입에 물었다. 깊게 빨았다. 술 때문인지 너무 오랜만이기 때문인지 핑 돌았다. 한 손으로 자신의 목 뒤를 잠깐 주물렀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 진짜 그런 게, 궁금하신 건가요... 제가. 일 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금요일 저녁에"

  

내장까지 게워내던 남자가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시원하게 침을 모아 뱉더니 다시 골목 끝 모둠 전가게로 들어갔다.




*                       *                        *                         *



두 달 전, 자신이 예약한 식당으로 '환영식'을 받으러 가는 건 어딘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압구정역 4번 출구에서 나와 도로를 따라 오분을 걸어내려가며 다섯 개의 성형외과 간판을 지나쳤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성격이니 지금쯤 저곳들 중 하나에서 ***의원이 나오고 있을 터였다.


거리는 소나기가 한번 퍼부을 듯 사방이 어두컴컴해지고 있었지만, 좁은 계단 한층을 올라가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환한 공간이 펼쳐졌다. 창문이 없는 벽전체를 밝은 오크 원목 패널로 감싸고 간접 조명을 설치했다. 야생화처럼 보이는, 이름 모를 아련한 이파리를 가진 식물들이 주변에 옹기종기 심어진 작은 인공 분수에서 안개같은 물방울이 퐁퐁 솟아올라오고 있었다. 봄날의 일본식 정원처럼 어딘가 부조화스러우면서도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지금쯤 출발했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 의원은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통화를 하다가, 이제 막 현관문을 밀고 들어오는 상훈을 향해 오른손을 살짝 들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방금 받은 시술 때문인지 50대 중반인 그녀의 턱과 눈밑, 피부의 곳곳이 빨갛게 얼룩덜룩했다.


"신문 봤어요. *** 의원님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 해. 말려들지 말자고. 그런 건 무대응이 최선이니까. 대신 받을 수 있는 건 받겠다는 여지를 남겨 두자고요."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 의원의 옆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나무 도마에 생와사비를 갈던 일식 요리사는 상훈에게 살짝 눈인사를 하고는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앞접시에 처음 나온 것은 연두색 키위 소스를 올린 두툼하게 자른 가리비 관자였다. 멀찍이 거리를 둔 다른 한 테이블에도 같은 요리가 나왔는데, *** 의원 앞에만 부드러운 일본식 달걀찜인 차완무시가 서빙되었다. 별다른 메뉴판 없이 요리사의 선택에 따라 신선한 제철 재료로 만든 음식을 내놓는 식당의 원칙을 무시하는 특별 서비스.  *** 의원은 식당의 단골 손님이었다. '아 맛있겠다'라고 작은 탄성을 내더니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는 상훈을 보고 방긋 웃었다. 그리고 다음 수저를 떠서 입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자기는 뭐, 이쪽 일에 별 꿈 없다고 했다면서? 솔직해서 난 그게 더 맘에 들더라고. 젊을 때 한 번 그렇게 살아봐야 되는 건데... 맞아, 꿈 그런 거 없어도 돼. 첨부터 꿈 있는 사람, 목표 있는 사람. 이쪽 기웃거리는 얘들 중에 너무 흔한데 제일 먼저 나가떨어지더라고. 근데... 꿈같은 건 없어도 되는데. 

이건 안돼요. 회의주의자... 비관하면 끝이야, 우린.  그거... 자기야 의외로 쉽지 않다? 알죠, 나 무슨 얘기하는지? "



물론 무슨 얘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상훈은 ***의원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 두 번째로 나온 문어숙회를 잘근잘근 씹었다. 의원은 127년 전통을 자랑한다는 일본식 생맥주를 시켰다. 짙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맥주잔을 들어 어색한 건배를 하고 있을 때. 대머리 보좌관이 차키를 바 테이블 위에 짤그랑 올려놓고는 입맛을 다시며 옆자리에 앉았다.


"... 아이, 이번에 시술 또 너무 잘되면. 안티도 늘어날 텐데요? 좀 불쌍한 이미지 그런 게 있어야 되는데. 의원님. 대중 심리라는 게... 박해요. 이쁜 거, 똑똑한 거. 그거 다음이 뭐가 필요한데. 

암튼 이번 TV토론회 때는 최대한 인간미 뽑는 거 그게 젤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뭐 껄끄러우시겠지만 민원이 계속 들어오고 하니까. 청계 쪽 난리 난 거 보고 상인들이 많이 불안해하거든요. 서울시하고 잘 협의되어 있다...  이번에 시장 만난 거 보고도 해주시는 거, 제가 약속 잡아놓겠습니다."



대머리 보좌관은 핑크색 전갱이를 입에 넣으면서 혼잣말하듯 빠르게 보고를 이어갔다. 그는 겹눈의 잠자리처럼 여러 개의 스크린을 띄워놓고 보이지 않는 페이지를 펼쳐서 읽는 것 같았다. 상훈은 못 알아듣는 척하면서 다 듣고 있었다. 가시를 잘 발라낸 붕장어의 기름진 껍데기에서는 숯향이 났다. *** 의원은 주황색 성게알을 빤히 바라보며 연거푸 맥주 두 잔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대머리 보좌관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상훈을 보며 싱긋 웃었다.




*                       *                        *                         *





오랜만에 시네마테크의 관객석이 꽉 찼다. 10년 동안 백수생활을 했다는 40대 초반의 영화감독은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쓴 데다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어서, 얼굴의 반이 보이지 않았다. 한쪽 손은 주머니에, 한쪽 손은 마이크를 들고 관객들의 여러 질문에, 미소를 짓거나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라고 짧게 대답했다. 흥행 스코어를 갱신하고 있는 자신의 공포영화 얘기 대신 최근에 빠져있는 커피에 대해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왕자병이야, 뭐야."


덕주는 들고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의 얼음을 흔들며 관람석에서 먼저 빠져나갔다. '돌이킬 수 없는 걸음.' 그래도 상훈은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음악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덕주의 뒤를 따라나가며  에릭 로메르의 '녹색광선'이나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상영한 날, 그 침울한 분위기와는 180도 다른 활기찬 분주함에 괜히 기분이 좋았다.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 감독은 시네마테크 자원봉사자들과의 뒤풀이 자리까지 따라왔다. 처음의 수줍은 분위기와는 달리 의외의 수다쟁이였다. 시네마테크 식구들은 영화 장면의 미장센과 배우들의 연기를 끌어낸 연출 기법에 대한 전문가들이나 할 법한 구체적인 질문을 했지만, 감독은 자꾸 야구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 여기 시나리오 쓰는 사람 하나 추가요. 상훈이 아저씨 그때, 누아르라고 했나. 첩보물이라고 했나. 어쨌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얘기를 쓸 거라고 했지. 근데 그게 말이 돼나, 말이 돼요 감독님? 해피엔딩? 어머! 귀까지 빨개졌어, 뭐야. 아저씨 지금 부끄럼 타는 거야? "

 








- 계속



화사 _ LMM


https://www.youtube.com/watch?v=ijfpolQfzvI


세상일이란 게 다 이래. 네가 그리는 대로 세상이 아주 달콤하게 돌아가는 게 아냐.  - 영화 '장화홍련' 중에서











PS 백신. 안아프다고 그러던데. 뻥입니다. 아픕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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