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간에 이전보다 더 큰 힘과 전투력을 이끌어내는 '아나볼릭 스테로이드'계 약물의 핵심은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의 유사성이다. 주목할 것은 바로 근섬유질의 확대와 충혈감이 인간의 행복이나 만족감과 직결된다는 데 있다. 상훈은 뛰고 있었다. 골목을 달리고 있었다. 토요일 이른 새벽부터 만리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조기축구모임의 회원 몇몇이 옆구리를 돌리며 몸을 풀다가 전력질주로 달려가는 상훈의 모습을 담장 너머로 물끄러미 쳐다봤다.
집으로 가는 대신 종각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음 주말 회의에 내놓을 브리핑 자료를 마저 번역하기 위해서였다. 독일 환경단체 분트에서 내놓은 <프라이부르크, 생태도시 아이디어 32>는 단 넉장으로 줄이기에 그 양이 방대했다. 그렇지만 이틀 안에 끝내기로 했다. 의원이 10분도 고민하지 않을 사안에 대해 상훈 역시 자신의 청춘을 더 나눠주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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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 만난 성인 남자가 그렇게 꿈꾸듯 행복한 모습으로 수다를 떠는 것을 보는 것이, 상훈은 어색했다.
"아시죠? 상훈 씨. 군대 아침 구보하듯이 뛰는 건데. 근데... 기분이 달라, 달라. 세렝게티 초원을 달리는 얼룩말처럼 매일매일 펄럭거려."
1차 퇴고를 마쳤다는 J감독의 얼굴은 생일날 아침상을 받은 소년처럼 빛났다. 그가 만들 첫 번째 장편 영화는 자폐소년이 달리기를 하는 얘기라고 했다. 그는 소주 한잔을 쿨럭 입안에 털어 넣고 호주 유학시절 서부의 피나클스 사막에서 본 석양의 오렌지 색깔과 이어서 손바닥에 잡힐 듯이 쏟아져내렸던 은하수에 대해 얘기했다. 오랜 친구인 듯 소원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얘기를 경청했다. 아귀찜 집에서 나온 J감독은 이유 없이 놀이터 사잇길을 달려갔다. 소원이 그의 뒤를 쫓아갔고, 상훈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하얀 발목을 노려보며 뛰었다.
그날 헤어지기 전에, 소원은 가방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 상훈에게 건넸다. 봉투 안에는 검은색 몰스킨 노트에 볼펜이 끼워져 있었다. 버스 안에서 펼쳐본 노트 첫 장의 오른쪽 귀퉁이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난 변태같은 스토리 좋아해. 생일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