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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점 Apr 22. 2022

유난히도 내성적이었던

어렸던 나를 만나는 시간


들어가면서

나를 알기 위하여 자기 발견 글쓰기를 시작했다. 더 이상 계획만 세우지 말고 부족한 내 모습을 빠르게 들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쓰는 행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잘 쓰고 싶다는 욕구가 또 스멀스멀 올라오더니 문장 하나하나를 검열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건 좀 주제와 안 맞는 것 같은데', '이런 걸 쓰면 내가 너무 이상해 보일 것 같아' 등등.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예전에 솔직한 글을 써보자고 다짐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김태균 님의 세바시 강연 영상을 다시 찾아보았다. 김태균 님도 자격지심과 강박이 심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신 '삶은 짧으니 즐겁게 살아라.'라는 말을 듣고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하여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했다. 그렇게 1년 동안 쓴 글은 책이 되었다. 책에서 김태균 님은 확실하게 이야기한다. 죄송하지만 이 글은 오로지 나를 위한 글이며 독자님들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솔직하게 적었던 그 글은 다른 사람이 '김태균'이라는 사람을 더 잘 알게 된 매개체가 되었고, 삶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글이 되었다. 만약 생각과 표현을 검열하면서 누구나 보기 좋게 적었다면 이런 영향력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아닐 것 같다. 모두를 위한 글은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무색무취의 글.


그렇다고 해서 내 글이 김태균 님처럼 나에게도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글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저 타인의 시선을 너무 신경 쓰느라 아무것도 아닌 글이 될 바에야, 적어도 나에게 만이라도 도움이 되는 글을 적어보자고 다짐하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글을 봐주시는 분들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욕심은 있다)


아직 미숙한 존재이기 떄문에 지금 쓰는 글들은 오직 나를 위한 글이 될 것 같지만 내가 지금보다 성장한다면 나는 물론 타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글을 적고 싶다. <빅매직>에서는 그 과정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전에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책을 쓴 적이 있다. 내가 이루려 한 것은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보다시피 나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알아가도록 도움을 줄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빅매직>






삶의 첫 기억과 유년기

1992 - 2004


#1

내 기억은 지하에 살고 있는 집에서 시작한다. 방 2개에 거실 하나. 다섯 식구가 살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언니와 내가 한방을 썼고 엄마와 아빠, 동생이 나머지 한방을 썼다. 한번은 폭우가 쏟아져 집이 물에 잠기는 일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기생충>을 실제로 겪은 것이다. 엄마 아빠가 바가지를 들고 계단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물을 커다란 파란색 통에 담아 밖으로 퍼냈던 기억이 있다. 물이 찼던 흔적이 한동안 벽지에 새겨져 있었다.



#2

나는 낙서를 잘하는 아이였다. 집의 구석구석에 동그라미 아래 세모, 두 개의 선을 그리고 내 이름을 적어 놓았다. 동그라미는 얼굴이었고 세모는 치마, 두 개의 선은 다리였다. 제 딴엔 여자아이를 그리고 싶었나 보다. 책상, 벽지, 장롱 등등 낙서가 없는 곳이 없었는데 나도 왜 그랬는지 기억은 나질 않는다. 그냥 지금 생각을 해보자면 무언가 남기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었나 싶기도 하다.



#3

언제는 유치원에 가기 위해서 아침에 준비하고 있었는데 동생이 의자에 올라가서 나를 향해 유리컵을 던진 적이 있다. 머리에 정통으로 맞았고 유리컵은 깨졌다. 다행히 줄줄 흐르지는 않았지만 머리에서 피가 났다. 엄마는 유리 조각을 털고 피를 닦아주셨다. 그리고 나는 유치원에 갔다. 엄마가 나를 강하게 키우신 것 같기도 하다.


동생은 나를 자주 괴롭혔던 것 같다. 명절에 층이 높은 산소에 간 적이 있었는데, 동생이 나를 밀쳐서 아래층으로 떨어졌다. 운이 나쁘게도 떨어진 곳이 테두리에 돌벽이 처져 있던 묘였다. 덕분에 돌 모서리에 배가 조금 긁혀서 또 피가 났다. 떨어지고 나서 위를 올려다봤는데 아빠가 동생을 때리고 있었다. 사실 아프지는 않았는데 아픈 척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동생이 매우 어릴 때여서 지금 물어봤자 대답을 들을 수는 없겠지만 왜 그랬을까 궁금하긴 하다.


아니면 사람은 자신이 피해를 입은 것만 잘 기억하기 때문에 나에게 이런 기억만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혹시 동생의 기억 속에는 내가 자기를 괴롭히는 누나로 기억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나는 그런 적이 없는 것 같지만.




내향적인 아이


#4

웅비 웅변 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어릴 적부터 확실히 내성적이었던 것 같다. 아빠도 그 모습을 보고 말을 잘하게 만들기 위해서 학원을 보낸 것이었다. 대여섯 살이었나, 하도 어릴 때여서 사실 학원을 잘 다녔는지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언뜻 짧게 기억나는 것은 웅변대회를 했을 때 열심히 홍당무를 뽑았던 것이 가물가물 떠오를 뿐. 이런저런 연극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외칩니다!'라고 소리치며 두 팔을 벌려 마무리하는 것이 웅변의 끝이었던 것 같다. 학원에 다녀서 활발해졌다고 하면, 아니다.



#5

초등학생 때도 여전히 내성적이었다. 말이 정말 없어서 별명이 벙어리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을 하는 것이 창피했던 것 같다. 큰 소리를 내는 것을 어려워했다. 6학년 때였을까, 발표를 하면 모둠 별로 동그라미를 1개씩 그려주고 모든 수업이 끝나면 동그라미가 가장 많은 모둠에게 혜택을 주는 프로그램이 있엇다. 선생님은 내가 발표하면 동그라미를 3개씩 준다고 하셨다. 물론 나는 발표를 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를 말하게 시켰다. 체육 시간에는 한 명씩 나와서 외벽을 바라보며 약 5초 정도 크게 소리를 지르라고 했다. 한 줄로 서서 소리를 지를 차례를 기다리며 나는 벌벌 떨었던 것 같다. 그 시간과 상황을 너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속절없이 내 차례는 다가왔고 나는 한동안 벽을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속으로는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입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그냥 가만히 서 있었고, 내 눈이 뒤에 달리지는 않았지만 3~40명의 애들의 눈이 모두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앞서 다른 친구들이 순차적으로 소리를 지를 때는 삼삼오오 이야기하며 시선이 분산되어 있었지만 흐름을 깨는 순간 흐름을 깬 무언가에 시선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선생님은 한참을 기다리다가 소리를 지르지 못한 사람은 옆으로 빠져 있으라고 하셨다. 남들은 쉽게 하는 것을 나는 못 했고,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왠지 모르게 죄인이 된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혼자는 아니었다. 다른 여자 친구가 한 명 더 있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것에 조금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경험들은 내 성향을 탓하며 자주 우울에 빠지는 데에 일조했다. 남들은 쉽게 하는 것을 나는 하지 못한다는 박탈감, 그저 이렇게 태어났을 뿐인데 뭔가 잘못 살고 있는 것 같다는 불안감, 노력을 해보아도 쉽게 바뀌지 않는 허탈감 등. 말수가 적은 것이 죄처럼 느껴졌다. 활발한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고 그럴수록 나 자신은 초라해졌다.



#6

내성적이어서 친구가 거의 없었다. 게임을 좋아했는데, 아마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활동 이어서 그런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집에 컴퓨터가 처음 생겼다. 모니터 두께가 엄청나게 큰 컴퓨터였다. 삼보 컴퓨터로 기억한다. 여하튼 컴퓨터는 1개였기 때문에 언니와 동생과 컴퓨터를 차지하기 위해서 많이 싸웠다. 서로 하겠다고 잡아당기다가 마우스를 많이 끊어먹기도 했다. 그때는 컴퓨터 금지 기간이었다. 그렇게 컴퓨터 시간을 쟁취해가며 한 게임은 바람의 나라, 트릭스터, 그랜드체이스 같은 것들이었다. 어릴 때도 넥슨과 넷마블이 유명했다.


바람의 나라를 생각하면 나도 참 순수했다고 생각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바람의 나라를 19레벨까지는 무료로 이용을 할 수 있었지만 20부터는 유료로 전환되는 정책이 있었다. 레벨이 20이 되는 순간 얼럿창이 뜨면서 게임이 꺼졌다. 내용을 제대로 안 읽어 봤는지, 안내 메시지가 불친절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는 정책을 이해하지 못했고 운이 나쁘게 오류가 난 줄 알았다. 매일 아침 하나님께 오늘은 게임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며칠 동안 계속 접속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



#7

6년간 교회를 다녔다. 집 근처에 있는 교회였다. 기독교는 아니었는데 아빠가 종교를 경험해봐야 한다고 억지로 보냈다. 경험만 하면 된다면 왜 이렇게 오래 다녔는지 의문이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다녔다. 6학년까지만 다닌 이유는 중학생이 되면 절대 가지 않겠다고 아빠와 약속했기 때문이다. 일요일이 되면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이 좋았지만 교회에 가야 하는 것이 너무 싫었다. 아침에 억지로 자는 척을 했던 적도 있다.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교회 사람들이 집까지 찾아왔다. 억지로 끌려간 적도 있지만 치열하게 자는 척을 한 날은 교회에 가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때는 아침에 텔레비전을 켜면 나오는 디즈니 만화를 보며 여유롭게 일요일을 즐겼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서 개그콘서트가 나오면 내일은 다시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슬퍼했다.








교복을 입는 나이

2005 - 2010


#8

중학생이 되면서 조금씩 말을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조용한 학생이었다. 중학생 때는 그렇게 특별한 기억은 없다. 꿈이나 목표가 있지도 않았고, 초등학생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에 가면 집에 가서 게임 할 생각만 했었다. 그때 반에서 몇몇 친구들끼리 메이플스토리를 같이 했던 기억도 있다. 공부는 못했다. 시험 성적표를 보여줬을 때 엄마에게 돌머리라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9

네이버 블로그를 중학생 때 시작했다. 첫 기록을 보니 손글씨를 올렸다. 포토샵으로 예쁘게 꾸미는 것에 조금 관심이 있어서 다음 카페에 가입하여 포토샵 강좌를 보며 배웠다. 친구들에게 손글씨를 만들어주기도 하고 네이버 지식인에서 손글씨를 요청하는 질문을 찾아서 원하는 대로 만들어주고 내공을 모으기도 했다. 이런 경험 때문이었을까, 환경 미화로 교실 뒤에 있는 게시판을 꾸며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친구들의 추천으로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주제는 남한산성이었다. (학교 바로 옆에 남한산성이 있었다) 주제를 내가 정했는지 정해져 있던 건지 모르겠지만 남한산성에 대한 정보와 사진을 직접 찾아서 넣었고 예쁜 브러시를 다운받아서 꾸몄다. 선생님도 좋아하셨던 것 같다. 디자인 파일은 선생님께 보냈고 커다란 종이에 인쇄되어 게시판에 붙은 내 디자인을 보고 나도 나름 보람을 느꼈었다.


블로그에 남아있는 손글씨

(아마 이때 인터넷 소설이 유행해서 소설 제목이나 인기 문장으로 손글씨를 만들었던 것 같다. 슈퍼주니어도 좋아했었다.)



#10

고등학생은 선택과 고민의 시절이었다. 1학년 때는 이과와 문과 사이에서 걱정했다. 2, 3학년 때는 당연히 대학 걱정을 했다. 초등학생 때 엄마 아빠에게 하버드에 간다고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아주 헛된 말이었다. 물론 어디서 하버드가 좋은 대학이라도고 주워들어서 그냥 말한 것이겠지만.


진로 고민과 별개로 친구에게 부모님의 이혼 고민을 말한 적도 있다. 엄마 아빠는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크게 싸우실 때가 있었다. 한번은 물건을 던지면서 싸우셨다. 방에 틀어박혀서 불안해했던 것 같다. 원래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 부모님이 이혼하시면 어떡하지, 만약 엄마 아빠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그냥 집을 나가시면 어쩌지 등등 별 고민을 다 했다. 물론 지금은 잘 살고 계시지만.


나는 큰소리가 나거나 싸우는 것을 무숴워했던 것 같다. 회피형 성향이 강해서 싸울 일이 생기면 그냥 피해버리곤 한다. 짜증이 날 때는 아예 말을 하지 않는 편이다. 엄마를 닮았다. 아빠와 싸우고 난 후에 엄마는 아빠를 한동안 없는 사람으로 치부한다.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풀어지면서 괜찮아진다. 그러다가 다시 싸우면 또 반복된다. 그 모습이 좋아보이지 않았지만 내가 그렇게 살고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더 심했다. 사람에게 실망하면 풀 생각도 하지 않고 관계를 끊어버린다. 물론 상대방이 먼저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하면 풀렸지만 내가 먼저 관계를 이을 생각을 시도는 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이미 나에게 실망했을 거야', '이미 나를 싫어할 거야', '어차피 이런 싸움이 또 반복될 거야. 차라리 잘 된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런 인간관계 방식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사람들과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웠다. 다가가고, 이야기하고, 이해시키면서 감정 소모를 하는 것보다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편했으니까. 친구가 없는 이유는 여기 있는 것 같다. 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 중에 지금까지 가끔 보는 친구는 딱 2명이다.




사람은 어렵다


여전히 사람과 깊은 관계 맺는 것을 어려워한다. 사람들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려 하지만 벽이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어릴 적부터 친구가 많지 않아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친해지는 방법을 잘 모르겠다. 괜히 친한 척을 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지도 않은데 내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닌지, 지금 하는 질문이 혹시 상대에게 실례되는 질문은 아닐지 등. 무엇 하나 편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업무적으로 만나는 관계는 일 얘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괜찮았다. 사적인 관계가 문제였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너무 어려웠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나의 본모습을 알게 되면 매우 실망할 것 같았다. 솔직해진다면 나의 치부를 들킬 것 같았다. 그래서 포장했다. 친절하다, 성실하다, 착하다, 열정적이다. 좋은 사람, 뛰어난 사람으로 느껴지면 좋을 것 같으니까. 어느 누가 나쁜 사람으로 보이고 싶겠는가. 예전에 누가 나를 보고 살면서 욕을 한 번도 안 해봤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매우 찔렸다. 사실 나는 상식도 매우 부족하고, 속으로 욕도 자주 하고, 게으르고, 귀찮으면 안 씻을 때도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서 시간만 낭비하는 때도 많다.


그냥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살면 좋을 텐데. 자기 발견을 통해서 나의 기준이 명확하게 세워지면 타인을 신경 쓰는 것도 많이 줄일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너무 사람을 피하기만 한 것 같아서 다가가지는 못할망정 피하지는 말자고 최근에 다짐하고 행동도 조금씩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사적인 1:1 약속은 절대 잡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어색하더라도 일단 만나보고는 있다. 이로 인한 성과는 회사에서 술친구 한 분이 생겼다는 것.


앞으로는 더 나아질 수 있겠지? 그래야만 한다. 이제 내 삶의 목적은 개인적인 성장은 물론이고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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