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있게 일하는 것도 의미 있게 사는 삶의 과정이다.
일과 삶의 균형,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요즘 심심찮게 들리는 단어다. 어떠한 상황 또는 상태에 이름이 부여되고, 그 이름이 모두가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퍼진다면 꽤나 중요한 화두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회사에 다닌다는 것은 직원은 자신의 역량과 시간을 회사를 위해 사용하고, 회사는 그 능력과 시간에 대응하는 돈을 제공하기로 계약한 관계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는 계약한 시간, 즉 워라밸을 지켜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직원이 기여한 성과에 대한 처우를 제대로 하지 않고 부려서도 안 될 일이며,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그저 시간만 때우다가 월급만 받아서도 안 될 일이다. (물론 개인적인 차원에서 더 성장하기 위하여 정해진 근무 시간을 신경 쓰지 않고 초과 근무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개인의 열정과 관련된 부분은 일단 여기에서는 논외로 두었다.)
그러나 이런 노동 차원에서의 일과 삶만 이야기하기에는 내 삶에 있어서 좋은 방향성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내 목표는 회사에 얽매이지 않고 나의 비전을 따라 일하는 것이며,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원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회사가 없는데 워크와 라이프를 구분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한 일은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더욱더 나눠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일과 삶을 딱 나누어 설명할 수 있을까. 만약 일을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면, 일하는 시간은 돈을 벌기 위해 소모되는 시간이며, 삶은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이 될 것이다. 직장인으로 따지자면 9 to 6까지가 일의 시간, 나머지는 삶의 시간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맞지 않는 정의라고 생각했다. 만약 일이 정말 돈을 벌기 위해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면 회사를 다니고 정기적으로 괜찮은 월급을 받고 있는 지금 상황에 불만을 가질리가 없지 않았을까. 잘 하고 있는 것이 맞았고, 먹고 살기에 지장이 없는 돈을 받고 일하지 않는 남은 시간에는 삶을 즐기면 되니까. 그러나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계속 싸여 있었다. 안정적이라고 볼 수도 있는 지금의 삶이 왜 이렇게 막막하고 불안한 것인지 답답하기만 했다.
일의 목표가 돈 자체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일에는 더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 같았다. 돈을 벌기 위해서 사기를 치고 싶지도 않았고, 불편한 고객 경험을 제공하여 일시적으로 매출을 끌어올리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또한 로또에 당첨되어 일확천금을 벌게 된다면 행복해질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물론 일시적으로 그런 감정이 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단순히 돈이 많다는 이유로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삶은 순간이 아니라 과정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일과 삶이 나뉜다는 것은 삶에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일반적인 회사를 다닌다면 최소 9시간을 회사에서 보내게 되는데, 이 시간이 내 삶이 아니라고 한다면 내 인생을 팔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누구나 똑같이 하루 24시간이 주어진다고 생각했지만 일이 삶이 아니라면 하루에 내 삶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고작 15시간에 불과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나는 일과 삶을 확실히 나누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업무 시간이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문제가 생긴 상황에서 퇴근 시간이 되었다며 손 놓고 퇴근해버린다면 그에 대한 피해는 오로지 다른 동료가 끌어안거나, 아니면 고객이 계속 불편함을 느끼는 수밖에 없다. 책임감도, 일의 철학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사람과는 같이 일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이 작업한 것들에는 구멍과 버그가 많이 발생한다. 일의 목적을 이해하지 않았고 사용하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시키는 대로 했으니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간이 흘러도 실력에 발전이 없고 항상 안 되는 이유만 이야기한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반대로 책임감과 의미를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들은 본받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이런 분들은 같이 서비스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더 좋은 방향이 있다면 먼저 개선 의견을 내주시고, 스스로 버그를 발견하며 구멍을 고치는 사람들이다. 기획에 적혀있지 않아도 고객 관점으로 서비스를 이용해보며 좋은 기술을 학습하여 유용한 기능을 구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 서비스가 고객에게 나가기 전에 적극적으로 QA*를 요청하며 더 완성도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남 탓을 하지 않는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고치려고 노력한다. 이런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실력이 발전되며, 어떻게든 일이 되는 쪽으로 이야기를 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좋고 이렇게 살고 싶다.
QA (Quality Assurance) : 서비스 배포 전 문제가 없는지 성능 테스트를 진행하는 것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삶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24시간이 내 시간인 삶을 살고 싶다. 돈을 벌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내 시간을 팔아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돈도 벌면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 시간이 흐를수록 발전하고 성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남 탓, 환경 탓을 하면서 고여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도 업무 스킬을 높일 수 있는 학원에 다녔고, 퇴근을 하고서도 내가 정한 루틴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자기 발견 글쓰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물론 매일 진행하지는 못하고 피곤한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기도 한다) 이런 행동도 결국 나에게는 일과 삶이 나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면 더 의미 있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더 의미 있게 살면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
확실히 나는 회사 생활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일상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다.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잘 풀리지 않으면 퇴근하고서도 우울하고, 프로젝트가 잘 풀리고 좋은 평가를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퇴근해서도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에 회사와 업무 생각을 너무 오래 하지 말자고도 다짐해 보았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일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일은 꼭 회사를 다녀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내 목표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 것일까? 답이 뚜렷하게 나오지 않아서 내가 왜 괜찮은 처우로 회사를 다니면서도 답답하고 만족스럽지 않은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1_도구가 되고 싶지 않다
최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초반에는 개발자분들과 회의도 진행하며 나름 잘 만들어 나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기획하고 디자인한 것들이 하나하나 구현되고 있는 것을 보며 꽤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배포되기 전 팀장님이 본인의 입맛대로 수정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런 행위가 몇 번 반복되자 있던 보람도 사라진 것 같다. 단순히 다른 사람의 손을 타서 불만족스러운 것일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당연히 나를 위한 서비스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서비스를 만드는 것이기에 여러 사람에게 개선 의견을 받고 수정하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며, 오히려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이유는 아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개선 방향을 제시하고 서로 소통하면서 수정해나간 것이 아니라 정말 다짜고짜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기획했는지에 대한 의견도 묻지 않고. 그런 일방적인 소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도구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2_나의 그림
남의 손을 타는 것을 싫어한다고 느낀 또 다른 경험도 생각난다. 예전에 화실을 다니면서 그림을 배운 적이 있었다. 강사님이 옆에서 그리는 방법을 알려주곤 했는데, 한번은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에 바로 그려서 알려줄지 아니면 다른 종이에 따로 그려서 알려줄지를 물어보셨다. 바로 다른 백지에 그려서 알려달라고 했다. 강사님이 내 그림을 손봐주신다면 더 멋진 그림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닌 것 같아서 내키지 않았다. 고작 작은 나무 하나였지만 다른 사람의 손길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으면 했다. 퀄리티는 조금 떨어지더라도 오로지 내가 그린 것을 만들고 싶어서. 그래야 내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3_내 시간
예전에 만들었던 기능과 페이지들이 리뉴얼되면서 사라지는 것도 싫었다. 물론 리뉴얼이라는 것은 회사 입장에서 보면 서비스의 발전을 의미하지만 나는 씁쓸했다. 아이디어를 짜 내고 다양한 방식으로 고민했던 그 과거의 시간이 날아간 것 같아서. 디지털 서비스는 계속해서 리뉴얼이 되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는 없어질 것을 만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진선 님의 「사수가 없어도 괜찮습니다」에서 이런 내 마음을 잘 설명해주는 문장을 발견했다.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마다 갈아엎기를 반복하는 온라인 서비스를 디자인하며 예쁜 쓰레기를 만들고 있다는 죄책감과 공허함에 빠져들곤 했다. 내 일에서 소명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나마 위안이었던 것은 웹디자인은 생성하고 폐기하는 과정에서 환경을 오염시키는 유해 물질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계에선 그저 Delete 버튼 하나만 누르면 그만이니까.
이는 곧 일을 왜 하는 걸까,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으로 연결되었다. 디지털 작업은 정말 쉽게 바뀌고 사라졌다. 눈에 보이는 것은 1초 만에 없앨 수 있다. 그래서 회사에서 운영하는 서비스와 상관없이 나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않는 방법을 고민했던 것 같다. 결론은 포트폴리오였다. 내가 이렇게 일했다고 남겨두는 것.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게 제작된 포트폴리오로 이직을 해도 내 서비스가 아닌 이상 똑같은 과정을 밟을 터였다. 그렇다면 내 서비스를 만든다면, 내가 없애지 않는 이상 남아있지 않을까?
워크맨에서 장성규님이 목표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가 되어야한다고 했다. 그래야 오래갈 수 있다고. 예를 들어 아나운서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 하거나 좋은 정보를 전달하고 싶다’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명사가 되는 순간 진정성이 없어지기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의 물꼬를 틀다가 현재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을 내렸다. 나의 의지와 비전으로, 남에게 좌지우지되지 않고, 내가 없애지 않는 한 없어지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것.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일을 하며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면서 살아왔다고 자취를 보여주는 것. 그런 일을 하며 살고 싶다고.
일과 삶이 구분되지 않고 지금 상황에 불만족스러운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계획이 명확하지는 않았다. 이럴 때는 롤모델을 찾고 배우는 것이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 내가 바라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수많은 선택의 갈래 중 어떤 이유로 그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그들에게 삶과 일의 철학이 무엇인지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참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유투브에서 영감을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개발자 천인우 님이다.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들이 모인다는 말이 사실인 것처럼 댓글에도 더 나은 삶으로 변화를 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천인우님, 본인의 선택을 설명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나요?)
의미 있었던 부분은 단기적으로는 비관론자, 장기적으로는 낙관론자가 되자는 말이었다. 무언가 이루기 위하여 매 순간을 노력하는 생활이 그렇게 즐겁지는 않을 것이다. 그 힘든 과정을 이해하면서 장기적으로는 삶이 발전한다고 믿는 것이 멋있있다. 또한 삶의 목표가 몰입할 문제를 찾는 것이라는 점도 인상 깊게 다가왔다. 내가 0이면 기회가 와도 0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눈길을 끌었던 댓글들
오히려 창업을 하고 싶다 이런 것보다 몰입할 문제를 찾고 있다… 의아했네요. 어쩌면 모르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르니까 경험하고 찾기 위해 노력하고. 인우님 말씀처럼 저도 자신의 기준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 끝없는 질문과 행동력. 귀감이 되었습니다.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다. 끊임없이 나아갈 방향을 생각한다는 건 매일 창조하는 일과같이 어렵다. 10년을 넘어 20년 후 큰 사람이 되어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
몰입할 문제를 찾고 있다… 많은 자극을 받고 갑니다.
이상적인 커리어패스를 완성했음에도, 본인만의 사명을 찾고자 끊임없이 도전하는 모습이 정말 멋있네요. 응원합니다.
사실 주어진 만큼 일하고 꾸준하게 월급을 받으며 퇴근 후에 쉬는 삶을 사는 것은 편할 수 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회사에 들어가 승진하고, 최대한 롱런하여 정년까지 일한 다음에 퇴직하고 여유 있게 사는 삶. 예전에는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