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살고 있는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답을 쉽게 내릴 수 없는 것 자체가 나를 잘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내 이름 석 자, 또는 누구누구의 딸, 어느 회사의 직군 정도가 떠올랐지만 이런 단순한 답을 내리고 싶지 않다. 만약에 내가 개명한다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되는가?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직군으로 직업을 바꾼다면 내가 아니게 되는가? 당연히 아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이게 나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쉽게 바뀌지 않는 무언가여야 한다. 그것은 철학과 가치관, 정체성인 것 같다.
내가 나로 살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는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성격과 내면의 성격이 다르다는 것도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성실하고 친절하게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생각보다 게으른 사람이고 다혈질이며 짜증도 많이 낸다. 물론 겉으로 잘 티를 내지 않는다. 아마 착한 아이 콤플렉스나 인정 욕구가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강박도 있어서 더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노력했다. 나름대로 성공적인 연기를 한 덕분에 모범 시민, 모범 직원이 되었고 답답함과 스트레스는 덤으로 얻게 되었다.
과연 나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속으로 생각하는 그대로 말을 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당연히 이런 일차원적인 문제는 아닐 것이다. 솔직함이 장점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은 좋은 삶의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나답다', '산다'. 두 가지 차원에서 더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나에서 우리로 태도를 바꾸다
나
성과에 목매던 시기가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어느 순간 데이터를 기반으로 성과를 체크하는 회사 분위기 속에서 내가 진행한 업무로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강박에 쌓여서 일을 했었다.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타인의 시선에 대한 신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근무 시간과 퇴근은 의미가 없었다. 정신은 회사 업무에 365일 사로잡혀 있었다. 당연히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저 일을 못하면 쓸모없는 인간이 될 것 같다는 두려움 속에 살았던 것 같다.
이때는 다른 동료들을 돕는 것이 조금 시간 아깝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매일 업무 일지를 작성하고 분기별로 성과 리뷰를 작성해야 했는데, 누구를 도와줬다거나 하는 것을 성과로 적기는 조금 그랬으니까. 그리고 누군가를 도와줬다고 적었는데 그 누군가가 내 성과리뷰 문서를 보고 '뭘 도와줬다는 거지?'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소심함... 그 시간에 차라리 내 업무를 하면서 더 많은 성과를 내는 것이 나에게 좋은 것이라 여겼다. 뭐, 결국 나름대로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나의 쓸모는 내가 아니라 회사에 있었다.
우리
최근에 얼떨결에 리더가 되었다. 이전부터 여러 차례 팀장님이 언질을 주었지만 내 성향상 리더는 맞지 않는다고 계속해서 거절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알겠다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면담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3개월 정도 해보겠다고 했다. 아마 팀장님도 경영진에서 압박을 받아서 리더 위치에 누군가를 놓아야 했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압박을 받을 사람은 아니었지만. 뭐 여하튼. 사실 말이 3개월이지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쉽게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 모르겠다. 어차피 회사에 오래 다닐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실패하면 쿨하면 그만두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했다. 회사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과거에는 절대 할 수 없었을 생각이었을 텐데 마음이 조금 떠나니 더 쉽게 도전해 볼 수 있게 되었다. 회사와 거리두기를 해서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제대로 해보자고 생각하고 일의 목표를 바꿔보았다. 팀원들에게 도움이 되는 동료가 되자고, 나의 역량은 물론이고 팀원의 역량도 높이며 리더십을 키워보자고 다짐했다. 퇴근 후에 시간을 짜내서 스터디 계획을 세웠고 주말에도 공부하면서 같이 논의하면 좋을 주제를 정리했다. 그리고 대략적으로 스터디의 방향성을 정하고 동료들에게 스터디를 제안했다.
스터디 계획 초안
한참 사이먼 시넥의 골든 서클 이론에 영감을 받을 때였다. 사이먼 시넥은 위대한 리더들이 행동을 이끌어 내는 방법으로 무엇을 하든 하든 Why를 강조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몸소 실천하고 싶어서 Why > How > What의 순서로 스터디의 목적과 방향성을 정리하고 공유했다. 그저 누군가 하자고 하니까, 업무로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 이유를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랐다. 시간 낭비가 아니라 서로 성장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무엇보다도 이 'why'를 어떻게 공감시킬지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가장 먼저 적었다.
다행히 동료 디자이너분들의 반응은 좋았다. 그렇게 나와 동료 디자이너 3명은 처음으로 정기 스터디를 시작하게 되었다.
첫 만남
저번 주에 스터디의 목적을 공유하는 킥오프 미팅을 진행했고 오늘이 본격적으로 스터디를 시작한 첫날이었다. '프로덕트 디자이너란?' 오늘의 주제였다. 디자인 방법론이 아니라 일하는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공유하고 공감하고 싶었다. 무엇을 하든 중요한 것은 태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모두 스터디 전에 자신이 생각하는 디자인 철학과 중요한 역량에 대해서 정리를 해왔고, 나름 열띤(?) 이야기를 나누며 총 4시간 동안 진행하게 되었다. 덕분에 오늘 글쓰기에 투자할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우리가 왜 디자인을 하는지에 대하여 서로 공감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전까지는 혼자 일을 하는 분위기였다면 조금은 팀이 된 것 같았다.
함께 하는 이들을 잘 살게 하자
회사에서 강조하는 8가지의 핵심 가치가 있다. 분기마다 이 핵심 가치를 기준으로 자신과 동료를 평가한다. 1에서 7번까지는 일과 개인적인 태도에 관한 질문이어서 스스로 나를 평가할 때는 평균 이상의 점수를 주곤 했다. 실제로 책임감을 느끼며 열심히 일했으니까. 그러나 8번 핵심 가치는 '함께 하는 이들을 잘 살게 하자'였다. 이 하나의 가치에는 타인이 들어가 있었다. 매번 이 여덟 번째 가치에 스스로 최하점을 부여했다. 도저히 함께하는 이들을 잘 살게 한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피해 끼치는 것은 정말 싫어해서 피해는 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도움을 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분기는 다를 것 같다. 주도적으로 스터디를 계획하고 조금이나마 팀이라는 분위기를 조성했으니까. '내 일'을 잘했다고 평가했던 이전과는 또 다른 만족감이 느껴진다.
상상하지 못했던 삶의 경험
나는 매우 내성적인 사람이다. 사람을 불편해하고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한다. 요새 유행하는 MBTI를 검사하면 내향이 항상 80%가 넘었다. 얼마나 심했냐 하면, 초등학생 때 별명이 벙어리였다. 학교에 나가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은 날이 많았다. 중학생이 되면서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말수가 적은 학생이었다. 매년 생활기록부에는 조용하다는 선생님의 평가가 적혀 있었다. 생활기록부에 부모님의 싸인을 받아야 했었는데 이 '조용하다'라는 평가가 너무 창피했었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에게 보여주지 않을지 고민했던 것 같다. 그리고 늘 걱정했다. 내가 과연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 나는 왜 이렇게 소심하게 태어났는지. 활발한 친구들이 부러웠다. 내향적인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사회에서 외향성을 이상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조용한 성격은 왠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태어나자마자 핸디캡을 안고 태어난 것 같아서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앞으로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삶이 그려지지 않아서 너무 막막했다.
그러나 지금은 기획 및 개발자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서비스를 발전시키고 고객에게 좋은 경험을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 또한 동료들에게 먼저 스터디를 제안하며 리드하고 있다. 물론 성향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눈치도 많이 보고 스트레스도 받고 목소리도 양처럼 떨리지만 나름대로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위에서 내려오는 의미 없는 일을 할 때도 있어서 신세한탄을 하기도 하는데, 이런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길게 보자면 긍정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 맞다. 과거에는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나로 산다는 것'은 지금의 상태를 쭉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평생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며 살았을 테니까.
삶에 의미는 없다
행복과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고민이 많았던 시기에 약간이나마 위안을 준 영상이 있다. 삶과 생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나눈 이야기에서 작은 영감을 받을 수 있었다. 삶은 원래 의미가 없는 것이고 의미를 부여하면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 의미가 없는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기 때문에 인간은 불행해진다고 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을 수는 없으니까.
대화의 희열 중
여기서 말하는 '삶'에 '나'를 대입해보면 나답게 산다는 것도 사실 나를 찾고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원하는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닐까.발견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만 숨겨져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즉, 이미 있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정말 '내'가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만약에 없다면? 없는 것을 찾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평생 없는 것을 찾아 괴로워하지 말고 만들어내면 되지 않을까. 내가 누구인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막막해하지 않고 자기 발견의 시간을 자기 '발명'의 시간으로 만들어보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지 말고 앞으로 되고 싶은 모습을 자유롭게 그려보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변하는 것에 한계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과 애초에 한계를 그어두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은 분명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다. 1%의 차이도 차이다.
아무리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고 글을 써봐도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을 때가 많을 것이다. 삶에 대한 고민은 평생 해야 한다고들 하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답을 찾아내려고 하지 말고 나만의 답을 만들어 가보자. 나와 내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붙여주자. 그게 바로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과정일 것 같다.
김춘수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내가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꽃이 되었다. 인생도 비슷한 것 같다. 그저 시간의 흐름에 불과하던 생(生)에 내가 의미를 부여한다면 인생(人生)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