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 저는 매국노의 딸이랍니다

by 신영웅

규하 “자, 내 손을 잡아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마차를 끌고 나타난 규하. 갑작스런 마차의 등장에 정체불명의 사내는 황급히 뒤로 물러난다.


규하는 유영의 팔을 잡아당겨 마차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태섭은 사내에게로 향한다. 마치 한 마리의 들소처럼 돌진해 그의 손에 있던 나이프를 쳐낸다.


정체불명의 사내 “생긴 거랑 달리 빠르군.”

태섭 “말을 할 줄 아는 분이셨구려. 조선말도 이해하는 눈치고.”


태섭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내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린다. 그러나 사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를 쉽게 피한 뒤, 오히려 태섭의 팔을 낚아채 그를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리꽂는다.


태섭 ‘이 사내 보통이 아니군.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태섭을 간단히 제압한 사내는 유영이 있던 방향으로 시선을 가져간다. 그러나 이미 유영은 그 자리에 없다. 저 멀리 사라져가는 마차가 언뜻언뜻 보일 뿐이다.


정체불명의 사내 “...”

사내는 말없이 멀어져 가는 마차를 지켜본다. 어째서일까? 그의 뒷모습에서 증오와 분노뿐만 아니라 왠지 모를 쓸쓸함마저 느껴진다. 태섭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일어난다.


태섭 “이런 걸 병법에서는 양동작전이라고 하죠.”


모든 것은 처음부터 규하의 작전이었다. 태섭이 낯선 사내를 제압하는 걸 돕는 동시에 사내의 신경을 태섭에게 두게 함으로써 안전하게 유영을 빼내오고자 한 것이다.


다만 사내가 예상외의 힘과 기술을 가진 것은 계산 밖이었다. 종로 바닥에서 무력으로 태섭과 맞먹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태섭 “자, 아무래도 우습게 볼 분이 아닌 것 같으니 지금부터는 나도 전력을 다해보겠소. 간만에 제대로 된 호적수를 만나니 피가 끓는구만.”


두 남자는 딱히 대단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 것 같지만 빈틈이 전혀 없다. 그 누구 하나 먼저 달려들지 못한다. 팽팽한 긴장감만이 둘 사이를 채우고 있다.


순검 “거기! 멈추시오!”


경시청 순사들이 우르르 달려든다. 대충 봐도 1개 소대쯤 되어 보인다. 이렇게 많은 순검들이 온 것은 아마도 태섭의 명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정도는 있어야 그를 제압할 수 있을 테니.


태섭 “안타깝구려.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소.”

순검 “아무리 히데오상 식솔이라도 더 이상의 경거망동은 삼가시오.”

태섭 “나는 그저 저 사내가 여인을 헤치려 하길래 도우려던 것일 뿐-”


순검과 대화를 하던 태섭은 정체불명의 사내가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그곳엔 이미 아무도 없다.


태섭 “귀신같은 사내군.”


◈◈◈


규하 “휴, 겨우 따돌린 것 같군요. 어디 다친 데는 없나요, 아가씨?”


마차를 모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규하는 고개를 돌려 유영을 살필 여력이 없다. 그저 앞을 보며 괜찮은지 묻는 것이 전부다.


유영 ‘아까 그 남자 분명 꿈에서 나를 쫓던 그 사람인데? 근데 간밤 꿈에 등장했던 사람이 왜 여기에 나타나? 가만... 그럼 그게 꿈이 아니란 거야? 그건 그렇고, 여기 분명 처음 와 보는 곳인데 뭔가 익숙해.’


유영은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반사적으로 손을 머리에 가져간다. 그러자 손에 피딱지가 묻어난다.


유영 ‘피? 어디 부딪힌 건가? 그나저나 어디로 가는 거지?’


그녀는 주변을 훑어본다. 개천을 따라 아담한 정자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작지만 꽤 운치 있는 풍모를 뽐내고 있다. 아래에는 큰 바위가 정자를 굳건히 받치고 있다.


규하 “처음 보셨나 봐요? 멋지죠? 세검정*이란 곳입니다.”

*세검정: 서울 종로구 신영동에 있는 6각 정자.


유영 ‘세검정? 그 구기터널 가기 전에 있는 그 세검정이라고? 그럼 여기가 서울이라고?’


규하 “저희 동네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죠.”

유영 “여기가 진짜 세검정이라고요?”


계속 대답이 없던 유영이 갑자기 소리치자 규하는 그만 놀라 고삐를 놓치고 만다.


규하 “죄송해요. 마차를 몬 건 처음이라서.”


규하는 재빨리 고삐를 쥐고 안정을 되찾는다.


규하 “세검정은 정조대왕 때 지어진 곳이에요. 요즘 일본인들이 지어놓은 저런 서양식 건물이랑 애초에 기운부터 다르지 않나요? 저 나무 기둥들 전부 200년 가까이 된 것들이에요. 놀랍죠?”


유영 ‘거짓말이야. 세검정은 해방 전에 탔단 말이야. 할머니 일기장에서 분명히 봤어.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세검정이 타버려서 너무 슬펐다고. 식사도 거를 만큼 말이야.’


자신을 위협하던 사내 못지않게 지금 상황 역시도 유영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유영 ‘혹시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삼촌들이 나 술버릇 고쳐주려고? 아냐, 아냐. 아까 그 남자 눈빛은 연기가 아녔어.’


영화에서처럼 볼을 슬쩍 꼬집어본다. 혹시 누가 볼까 소심하게 고개를 숙인 채 꼬집는다. 평소 이런 걸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하면서도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이 나온다.


유영 ‘아픈데...? 꿈이 아니라면 내가 왜 이 민속촌 같은 곳에 와 있는 거냐고!’


너무 황당해서 공포를 느낄 틈도 없다. 얼이 빠진 채 마차에 몸을 맡긴다.


규하 “저기요~ 아가씨?”


규하가 계속해서 불러보지만 유영은 듣지 못한다. 유영이 걱정된 규하는 조금 더 소리를 높여 그녀를 불러본다. 그러나 여전히 마차는 불안한 주행을 하고 있었기에 규하의 시선은 전방에 고정되어 있다.

규하 “저~기~요~~~ 괜찮으신 거죠~~~?”


유영은 이제야 자신을 구해준 이에게 시선을 던진다.


유영 ‘구해줘서 고맙긴 한데, 대체 이 여자는 어디서 나타난 거지? 게다가 마차라니... 설마...? 에이~ 아니겠지. 그런 건 영화에서나 나오는 얘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자신의 불안한 상상을 떨쳐내고 싶은 유영은 이 모든 것들이 삼촌들의 장난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유영은 복잡한 마음과 함께 자신의 몸을 더욱 마차에 구겨 넣는다. 그리고는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유영 “이건 몰카야, 확실해! 이 여자 마차 모는 거 봐봐. 완전 어설프기 짝이 없잖아? 그냥 민속촌 스텝을 급하게 섭외한 걸 거야. 그, 그렇겠지...? 그럴 거야. 맞아, 맞아. 이건 몰카가 확실해! 몰카야 몰카. 몰카가 맞아. 으이구~ 삼촌들도 참 할 일 없다. 으이구~ 으이구... 으이...”


몇 번이고 같은 결론을 낸 유영이지만 스스로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유영 ‘아니, 아니지. 아무리 내 술버릇이 멍멍이라도 그거 고치겠다고 이렇게까지 할 일이야? 이렇게 스케일이 큰 몰카라고? 그게 더 말이 안 돼. 그럼 진짜 내가...? 아니, 아니. 그것도 말이 안 되잖아. 뭐 하나 말이 되는 게 없어, 없다고.’


유영은 갑자기 뭔가 잊은 게 생각난 듯 자신의 카고팬츠 주머니를 뒤진다. 두툼한 물체가 만져지자 안심한다. 주머니에서 이를 꺼내서 한 번 더 확인한다.

유영 ‘휴, 다행이다. 할머니 일기장은 무사하네.’


닳을 대로 닳아 맨들해진 가죽 노트 한 권, 꽤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표지에는 엉겅퀴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일기장 속에서 오래되어 보이는 사진 한 장을 꺼낸다.


그 사진 속에는 기모노를 입은 채 태극기를 들고 있는 여성과 그 옆으로 4명의 남녀가 환하게 웃고 있다. 그들의 밝은 웃음 뒤에는 죽음도 불사할 정도의 강렬한 의지도 함께 느껴진다.


유영 ‘할머니, 저를 지켜주세요.’


마차가 드디어 멈춰 선다.


규하 “도착했습니다. 제 마차 솜씨, 처음치구는 훌륭하지 않았나요?”


규하 특유의 말투가 유영의 귀에 들린다. 서울 토박이들만 쓰는 서울 사투리다. 코미디 프로에서 따라하던 말투가 떠오른다.


유영 “혹시 여기 서울이에요?”


규하 “서울? 그런 지명은 처음 들어보네요. 이곳은 한성입니다. 뭐 곧 경성으로 바꾼다는 얘기가 돌고 있긴 하지만.”


유영 ‘뭐? 한성이라고? 진짜 내가...?’


걷기에도 불편한 기모노를 입은 규하는 마차에서 내리는 게 쉽지 않다. 뒤뚱거리는 바람에 그녀가 입고 있던 오비*에서 뭔가 마부석으로 떨어진다.

*오비: 여성용 기모노를 입을 때 허리 부분에서 옷을 여며주는 띠


유영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규하 대신 유영이 줍는다. 그때 유영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엉겅퀴꽃 문양이 그려진 가죽 노트, 그러나 자신이 가진 것과는 달리 거의 새것이었다.


유영 “말, 말도 안 돼...”


규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제 안심하셔두 돼요. 이곳은 조선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니까요.”


유영은 거의 넋이 나가 있지만 이를 눈치채지 못한 규하는 자기소개를 이어간다.


규하 “이래봬도 대일본제국의 육군 군정 총책임자 소유의 집이랍니다. 곧 조선통감이 되실 분이기도 하구요. 저희 아버님, 그러니까 시아버지세요. 그리고 저는 대한제국의 외부대신이자 자랑스런 매!국!노!인 서하영의 막내딸 서규하라구 합니다!”


미소를 짓고 있는 규하지만, 그녀의 말 속에는 가족에 대한 냉소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조적인 태도가 담겨 있다.


유영 “이게 가능하다고...?”


유영은 지금껏 애써 외면해 온 현실을 거부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이 과거로 왔다는 것 말이다.


유영 “정, 정말 다, 당신이 서, 서규하라고...?”


규하는 유영의 반응이 의아하기만 하다. 사실 유영은 규하의 먼 후손으로, 평소 규하를 할머니라 부르며 동경해 왔다. 그래서 규하가 생전에 남긴 일기장을 간직했다. 얼마나 읽었는지 거의 외울 정도다.


유영 ‘진짜 내 앞에 있는 이 젊은 여자가 규하 할머니라니... 이게 말이 돼? 그렇지만 이걸 안 믿을 이유도 없어. 저 일기장이 그 증거라고...’


유영은 어안이 벙벙하다 못해 혀가 마비가 된 듯 말을 잇지 못한다. 놀랍다고 표현하는 것으로는 다 담지 못할 감정이 그녀에게 쏟아진다.


어찌 유영뿐이겠는가? 어느 누가 지금 상황을 단번에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규하 “괜찮으신가요? 아무래도 아까의 소란 탓에 많이 놀라셨군요.”


유영은 이미 규하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믿을 수 없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이 상황에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막막한 그녀다.


만약 규하가 눈앞에 없었다면 유영은 끝까지 부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매일 사진으로 봐온 그 모습 그대로 그녀가 지금 자신을 걱정하고 있지 않은가.


유영 ‘사진으론 흐릿해서 반신반의했지만 실제로 보니 나랑 정말 많이 닮았네. 아니, 닮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나라고 해도 믿겠어.’


규하 “그나저나 들어가서 조금 씻으셔야겠어요. 꼴이 말이 아니네.”


유영 ‘근데 할머니는 나를 왜 못 알아보는 거지? 이렇게나 닮았는데?’


유영은 지금 자신의 몰골을 전혀 알 수가 없다. 과거로 온 이후로 거울 한번 제대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몰골이 말이 아니다’란 표현은 지금의 유영에게 딱인 표현이다.


게다가 1909년에 빨간 머리로 탈색한 조선인은 흔치 않다. 아니, 없을 것이다. 그 머리에 모든 시선과 신경이 갈 수밖에 없기에 규하는 유영과 자신이 서로 닮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유영은 규하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규하는 미래의 후손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규하 “아까부터 그 눈빛 하며... 그렇군요. 당신은 제가 누군지 알고 있는 눈빛이군요.”

(2화 끝. 계속.)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