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나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사람들과 원하는 관계를 맺어왔다. 그리고 돌아보면 오랜 시간 함께하는 사람들은 대개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다. 외향적이고, 단순하고, 걸음이 빠른 사람들. 지금 친한 친구들 몇을 떠올려보면 누군가는 직접 요리를 해서 왁자지껄하게 사람들을 불러 모아 파티를 벌이거나, 여행을 좋아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데에 거리낌이 없거나, 이야기를 하면 탁구를 치듯 빠르게 말이 오고 가고 파하하 웃는 그런 친구들이다.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온 관계와는 완전히 다르다. 지금까지는 내가 주도하여 나와 나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의 연결을 맺고 끊어 왔다면, 회사에서의 나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과 선택할 수 없는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관계가 순수한 인간적인 관심에서 시작되었다면 회사 사람들은 만나게 되는 계기도, 이어주는 것도 '일'이다.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이 '일'이란 것을 매개로 하여 저마다의 자리에서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은 배경도, 성격도, 일을 하는 스타일도 닮아있기보다는 다르기 그지없다.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하루 중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대개 직장인들이 힘들다고 하는 이유들 중 언제나 독보적으로 상위권을 차지하는 것이 사람 문제라는 것이 이해가 된다.
회사의 탁월한 워크-앤-워크 밸런스 덕분에 하루 온종일 회사 사람들과 함께하며 점심 저녁을 꼬박꼬박 함께 먹은 지 몇 개월. 작지만 인상적인 사건이 있었다. 마케팅 회사와 영상 관련하여 진행하고 있던 사안이 있었는데, 대표를 포함하여 네댓 명이 회의를 하던 중이었다. 대표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지금 업체에서 보내온 이 비디오 컨셉 어떻게 생각해?"
나는 꽤 단순하다. 단순해서 그런 건지 생각하면 실행으로도 곧잘 옮기고 말도 빠른 편인데, 질문을 받으면 생각과 동시에 말을 한다고 할 정도로 우다다다 답변을 쏟아내는 편이다. 갑작스러운 질문이긴 했지만, 그래도 회의 중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해놨기에 질문을 듣자마자 나름대로 생각을 쏟아냈다.
대표는 이제 Y에게 눈을 돌려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질문을 던졌다. 평소에도 굉장히 신중한 편인 Y는 어떨 때 보면 '참 복잡한 사람이다'하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성향만으로 보면 나와는 많이 다른 사람이다. 질문을 받은 Y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다. '지금쯤이면 말이 나와야 하는데...?' 내가 생각했던 타이밍에 말이 나오지 않자 생경한 느낌이 밀려왔다. 불안 비슷한 감정. 대표의 질문 이후 공간을 채우는 느릿한 침묵이 나는 어찌나 견디기 힘들었는지. 내가 아닌 타인이 주도하고 있는 침묵인데도 어색함에 몸이 배배 꼬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어색함과 불안은 나와 '다름'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었다.
"저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답. 놀라웠다. 업체에서 제시한 컨셉으로 기대할 수 있는 부분, 아쉬운 부분, 아쉬운 부분을 채울 수 있을만한 레퍼런스 등 내가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창의적인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달음박질치는 얕은 생각이 아닌, 잠깐 숨을 고르고 멈추어 꺼내는 깊은 생각. 회사가 원하는 답변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회사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특이하지만 전혀 특이할 것 없는 '일터'라는 공간. 그 공간을 채우는 회사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름'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가 아닌, 다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크고 값진 배움의 장이라고 생각하면 회사 가는 길이 조금은 더 즐거워지지 않을까 싶다. 아직 배울 것이 너무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