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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 Jan 18. 2024

불행에 관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엄마가 내 결혼식 축사 중에 했던 말이 정인이는 아빠를 닮아서 걱정 없고, 유쾌하고, 무엇보다 오바가 심하다는 말이 있었다. 그 말에 평소 내 성격을 잘 아는 친구들이고 남편이고 깔깔대고 넘어갔던 것이 기억난다.


대학생 때 C였나 D였나 상상초월의 학점을 받았던 일이 있다. 그 당시에 전체 학점도 한 2.9였나 박살이 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가 공부 안 해놓고 뭐가 그렇게 억울했는지 교수님께 메일도 쓰고 난리를 쳤다. 


그 당시에 메일을 썼던 교수님과는 꽤 친했었는데 이메일을 보내니 교수님께서 중간, 기말 성적까지 친절히 확인해서 답장까지 써주셔서 확인사살까지 당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메일이 아마 어디 있지 싶은데...

으아 무려 11년 전

그땐 그 학점이 어찌나 속상하던지 아빠한테 전화해서 징징대다가 실제로 울어버렸는데 아빠는 수화기 너머로 다 큰 딸이 꺼이꺼이 우니 그게 아주 우스웠나 보다.


껄껄대면서 나한테 했던 말이 압권이었는데 "앞으로 울 일 많은데 뭐 이런 거 가지고 울고 난리고?"

딸이 속상해서 난리인데 아빠란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듣는 나도 어이가 없어서 같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경상도 아부지라 그런가? 해도 안 그런 아빠도 많던데, 우리 아빠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첫 남자친구와 헤어져서 집에서 울고 불고 했을 때도 실제로 아빠는 동생에게 "느그 누나 왜 저라노?" 라며 옆에서 그렇게 껄껄 웃으면서 직관을 하더라. 그날도 아빠에게 졌다. 울다가 웃다가 밥 잘 먹고 잘 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빠가 그렇게 하니 정말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내가 지금은 마음이 아프고, 아주 뒤로 넘어갈 거 마냥 속상한데, 그거 별 거 아니고 심지어! 앞으로 울 일이 더 많다고 하니 지금 이 일이 진짜 작디작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아빠의 그 말은 맞았다. 실제로 그 이후로 울 일이 훨씬 많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병에 걸리거나, 회사에서 잘리거나, 구설수에 오르거나. 그러나 절망이 들이닥칠 때마다, 이젠 내가 스스로에게 말해주었다. 이런 거 다 별 거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불행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그게 내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물론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하고 싶은 것이 불행이나, 일어난다 해도 뭐 어쩌겠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고 묻기 전에 '왜 나에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가'라고 물으면 사실 할 말이 없다. 랜덤하게 일어날 수 있는 절망과 불행의 룰렛이 내 앞에서 멈춘 것뿐. 그걸로 끝이다.


사실 이렇게 얘기하면서도 엄청난 양가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안에서 터전을 잃는 사람들, 상상조차 힘든 끔찍한 범죄에 휘말리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냐고 내게 묻는다면 솔직히 어렵다. 어렵지만 그럼에도 살아있는 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애써 말해본다. 그리고 기도한다. 불행은 당신의 탓이 아니니 부디 다시 일어나 달라고, 다시 행복해 달라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달라고.


요새 재밌게 읽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책 중 와닿은 한 구절을 소개한다.


'불행이 터졌을 때보다 불행이 지나간 후가 더 중요하다.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기를 기대해 봐야 소용없다...(중략)... 불행은 그 자체로 징계다. 불행이 이미 지나갔는데 자기 징계를 반복하는 것은 그 자체로 또 다른 불행을 불러오는 비극이 된다. 명백히 저지른 실수에 대해 변명하거나 축소하거나 미화할 필요는 없다. 깨끗이 인정하고 징계를 받고 우연히 생긴 비극으로 인생의 페이지에 적어둔 뒤 책장을 덮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벌써 새해의 보름도 넘어가고 있다. 사실 이 글을 써둔지는 한참 되었는데, 쉽사리 발행 버튼을 누르지 못했던 것은 혹여 누군가에게 나의 아무것도 아닌 이 글 한 토막이 생채기라도 낼까 싶어였다. 그럼에도 꼭 하고픈 말이 있다. 그대에게 혹시나 불행이 찾아온다 해도 가볍게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용기와 넉넉한 마음이 가득하길,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갈 영감과 기운이 가득하길 여기 이름 없는 한 인간이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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