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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작 Nov 28. 2023

망사스타킹

이상한 나라 쿠바


쿠바는 이상하다. 입국자들을 처음 맞는 국제공항 여직원들부터 그렇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보안검색 여직원들이 과하게 섹시하다. 일단 유니폼 자체가 범상치 않다. 남자 직원들은 평범한 정복이지만 여직원들은 위아래 모두 몸에 꽉 달라붙는 유니폼을 입고 있다. 보는 사람이 숨쉬기 힘들 정도다.


그리고 치마 길이는 왜 또 그리 짧은 지 거의 미니스커트 수준이다. 거기에 더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다들 망사 스타킹을 입고 있다는 거다. 그냥 검정 계열의 무난한 스타킹을 입을 법도 한데 망사 스타킹이라니, 그것도 공무원이. 게다가 그 망사 구멍이 촘촘한 것도 아니다. 손가락 하나는 넉넉히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숭숭 뚫려있다. 구멍 중간중간에는 장미꽃이나 나비, 심지어 전갈 문양까지 수놓아져 있다.


이건 성적 판타지 넘치는 사춘기 연습장에나 나올 법한 비주얼이지, 결코 한 나라 관문인 국제공항 직원 유니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여기는 다른 나라도 아닌 쿠바 아닌가. 공산당이 지배하는, 엄청나게 경직되어 있어야 할 일당 독재국가 아닌가 말이다.


입국 수속을 밟으려는 대기줄은 꼬리를 물며 늘어져 있고 사람들이 그 사이를 우왕좌왕 지나가는데도 간신히 줄은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직원들은 여유만만. 자기들끼리 농담을 주고받으며 깔깔거리기도 하고, 지나가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과도하게 포옹하며 엄청 수다를 떨어 댄다. 그렇다고 제지하거나 주의를 주는 직원도 없다.


대부분이 쿠바인인 입국자들 역시 마찬가지. 별 불만 없는 기색으로 그런 그들을 지켜보고만 있다. 어쩌면 무료하게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는 볼거리라도 있으니 낫지 않냐 하는 표정들인 것 같기도 하다. 잠깐의 지체도 용납되지 않는 엄청난 스피드에 익숙한, 저 먼 꼬레아에서 온 여행객만 그저 짜증나는 표정으로 지쳐있을 뿐이었다. 한국에서 저렇게 일했다가는 대기하는 사람들의 살의에 가까운 눈초리를 견디기 힘들었을 텐데.


영원할 것 같던 대기시간도 어느새 끝이 보인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엑스레이 검사대 건너편에서 여직원이 나를 부른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타이트한 미니스커트를 입고 서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두 다리를 살짝 벌리고 서있었기에 늘씬한 하체 라인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에는 검색봉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리 오라고, 어서 오라고,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게 손짓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 몽롱한 상태로 검색대를 통과한다. 이렇게 나는 혁명의 나라, 쿠바로 들어간다.


쿠바는 미국에서 '가깝고도 먼 나라'다. 사실 엘에이에서 쿠바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한국에서는 보통 캐나다를 경유해서 꼬박 하루가 걸리지만, 내가 살고 있던 엘에이에서는 약 6시간의 비행으로 미국 동부 도착 후 다시 쿠바행 비행기로 갈아탄다. 뉴욕에서 아바나까지 3시간, 마이애미에서 아바나까지는 1시간 남짓 걸린다. 미국 동부에서는 무척 가까운 거리다.


하지만 막상 쿠바에 입국하는 것은 쉽지 않다. 미국 국무부에서는 쿠바로 여행하는 미국 시민권자와 미국 거주 외국인에게 쿠바 여행 자격조건을 제한하고 있다. 가족 방문, 언론 취재, 연구/종교활동 등 구체적인 입국 사유들을 홈페이지에 나열하고, 이 조건을 벗어나는 사유라면 별도의 특별 허가신청을 받아야만 여행 허가가 나온다. 만약 열거된 사유에 해당된다면 쿠바행 비자를 신청하면 하는데 사실 이 부분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청’이라기보다는‘구매’라는 표현이 맞기 때문이다.


쿠바행 비자는 쿠바 영사관이나 대행사 외에 공항에서도 ‘구매’ 할 수 있다. 이것은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이나 캐나다 등 다른 국가에서 쿠바로 들어오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부 캐나다 항공사에서는 기내에서 쿠바 비자를 무료로 나눠주기도 한다.


비자를 산다는 말이 좀 이상하기는 한데, 쿠바는 여권 대신 티켓처럼 생긴 별도의 종이 위에 이름과 국적 등 신상정보를 쓰게 하고, 그 위에 출입국 도장을 찍는다. 한 장은 쿠바행 비행기에 탑승할 때, 나머지 한 장은 쿠바에서 출국할 때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이 티켓 가격이 출발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멕시코에서 쿠바로 들어갈 때는 20불이지만 미국에서 갈 경우에는 100불, 뭐 이런 식이다. 심지어 같은 출발 국가라 하더라도 항공사마다 다르다. 미국이 제일 비싼 이유는 잘 모르겠다. 선진국 프리미엄인지 아니면 괘씸죄 때문인지, 그저 이렇게라도 달러를 얻으려는 쿠바 정부의 노력이 눈물겨울 뿐이다.


이 비자는 비행기 탑승 게이트 앞에서 “Flying to Cuba”라는 포스터를 붙여놓은 쿠바직원이 직접 판매를 한다. 그 모습이 내겐 마치 테마파크 티켓부스처럼 보인다. ‘쿠바’라는 이름의 테마파크.‘ 어서 오세요. 이상한 나라, 쿠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바나행 비행기 탑승구, 쿠바비자를 사는 곳. 마이애미공항>  


쿠바나 Cubana 항공에 올라탔다. 아바나행 비행기 안은 늘 그렇듯 도떼기시장이다. 우리나라 70년대 시골 버스 분위기와 비슷하다. 조금 전까지의, 마치 6시간짜리 길고 긴 성당 미사를 본 것 같은 미국 비행기와는 180도 다르다. 이곳에서는 앞에 앉은 사람 머리 위로 짐을 떨어뜨리는 것은 애교에 불과하다.


비행기 앞쪽에 앉은 사람과 몇 칸 뒤에 앉은 친구 둘이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 큰 소리로 물어봐도 신경 쓰는 사람 없다. 자기들 얘기로 정신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양식 에티켓으로 보면 분명 짜증 날 일일지 모르지만 사실 난 그리 밉게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서양식’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것뿐이니까.


비행기가 이륙했다. 마치 정상으로 향하는 롤러코스터를 타듯,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기체가 공중에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뜩이나 긴장한 상태에서 들린 소리라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재빨리 좌우 상하 상황을 살폈다. 그때 내 머리 바로 위 수하물칸 문이 열린 것이 보였다. 그리고 안에 있는 짐이 곧 떨어질 듯 위태하게 흔들거렸다. 주변 승객들이 놀라 내 쪽을 쳐다봤고 저 앞 마주 앉아 있는 승무원도 눈을 엄청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본다. 기체가 이미 45도로 이륙하고 있어 그녀는 뛰어올 수도 없는 상황. 나는 반사적으로 안전벨트를 풀고 일어서 있는 힘껏 짐칸 문을 닫았다.


아주 짧은 순간, 내 몸이 크게 한번 휘청거렸지만 곧 중심을 잡고 자리에 앉았다. 저 멀리 승무원이 환하게 웃으며 엄지 척을 보낸다. 나는 마치 어벤저스라도 된 양 윙크로 화답했다. 눈이 작아서 그게 윙크인지 멀리서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참 정신없는 아바나행 비행기다. 금세 피곤이 밀려온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벌써 창밖이 깜깜하다. 저 아래 마을의 불빛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희마리가 없다. 그마저도 드문드문하다. 조금 전까지 바둑판처럼 정렬된 화려한 마이애미의 불빛과는 확연히 다르다. 아바나 상공이다. 전기 사정이 여전히 안 좋은가 보다. 하긴 뭐 다른 사정은 좋을 리 있겠냐마는.


곧 비행기의 바퀴가 땅에 닿았고 대부분 쿠바사람들인 승객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박수를 처댄다. 곳곳에서 환호성도 들린다. 비행기가 착륙했다고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들은 난생처음 본다. 그들의 얼굴에는 무언가 해냈다는 환희가 넘쳐 났다. 아니 당신들이 대체 무얼 했길래..


죽지 않고 살아서 도착했다는 안도일까. 쿠바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이런 광경이 무척 낯설었는데, 두세 번 다니다 보면 적응이 된다. 나도 박수를 칠 뻔할 적도 있다. 물론 이런 습관이 몸에 익으면 안 된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 바퀴 닿자마자 물개박수를 쳐대면 곤란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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