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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작 Dec 04. 2023

서인도제도


호세마르티국제공항을 나서자 매캐한 냄새가 몰려온다. 쿠바에 왔음을 알려주는 익숙한 냄새다. 가끔 한국음식이 그리울 때면 어디서 밥이 타나 하는 착각도 들게 되는 이 냄새의 정체는 자동차 배기가스. 워낙 차들이 오래돼서 매연이 심한데, 골동품 기관에서 나와 그런가 구수한 느낌마저 난다.


하지만 정작 그 시커먼 연기 안에 잠시 갇히면 수명이 몇 십 분씩 줄어드는 느낌을 실감할 수 있다. 티비에서만 보던 쿠바에 대한 환상을 공항에서부터 여지없이 깨트려 준다 - 어서 와, 쿠바는 처음이지?  검은 매연 사이로 후끈하고 습한 카리브해의 열기가 몰려온다.


적도 부근에 위치한 쿠바는 미국에서 불과 15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섬나라다. 한국과 일본이 반도와 섬으로 붙어있는 것과 지정학적으로 비슷하다. 단, 일본이 한국을 바라보며 굽어 있는 새우처럼 생겼다면, 쿠바는 엉덩이를 플로리다반도로 향하고 있는 형상이다.


지도만 봐도 두 나라의 관계가 짐작된다. 호시탐탐 한국을 노리는 일본 새우와, ‘내 엉덩이에 키스나 하라’는 듯 미국을 향해 등 돌리고 있는 쿠바 새우. 하지만 정작 쿠바 사람들은 자신들의 섬을 악어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쿠바 섬은 스페인어로 “El Cocodrilo (악어)”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악어보다는 수염도마뱀 Bearded dragon과 더 닮았긴 하지만.


이 쿠바섬은 한반도의 딱 절반 크기다. 한반도가 22만 평방킬로미터이고 쿠바섬이 11만 평방킬로미터. 그래서 한반도를 남북이 아닌 동서로 반을 자르면 쿠바 같은 사이즈가 나온다. 쿠바를 경계로 위쪽바다는 멕시코만과 대서양, 아래쪽은 카리브해로 나뉜다.


왠지 난 대서양 하면 올드한 중년의 느낌이 난다. 유럽과 미동부가 대서양과 맞닿아있어 그런 이유도 있고, 또 두 대륙이 오랫동안 그 항로를 통해 왕래한 세월이 있다 보니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실제 대서양의 나이가 1억 5천만 년 정도라고 하니 많이 올드하긴 하다.


그에 반해 카리브해에 대한 이미지는 젊다. 왠지 뜨거운 태양의 해변에서 비키니 입은 여자들이 비치발리볼을 하고 있을 것 같다. 그러다 갈증이 나면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트로피컬 주스를 마셔야 하고. 왜 그 과일주스에 허여멀건한 닥터페퍼를 섞은 듯한, 맛은 하나도 없지만 왠지 야자수 그늘 아래에서 마셔야 할 것 같은 ‘이국적’ 로망을 지닌 음료 말이다. 어릴 적부터 상업광고가 머릿속에 주입시킨 결과일 테지만.


이렇게 상반된 이미지의 두 바다가 쿠바에서 만난다. 그런데 이 지역 섬들을 사람들은 '서인도제도 West Indies'라고 부른다. 정작 인도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데도 말이다. 물론 콜럼버스 때문이다. 그가 1492년 10월 12일, 처음으로 산살바도르섬에 상륙한 후 그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착각해서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다. 그래서 이곳 원주민들도 졸지에 인디언으로 불리게 되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옛날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상륙했는데 그때부터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켈트족이나 켈트사람, 뭐 이렇게 부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 서인도제도는 또한 '캐리비언의 해적'으로 알 수 있듯 해적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으로도 악명 높았다. 섬들이 많아 숨어 있기 좋고 날씨가 좋아 열대과일 등 먹을 것이 풍부한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대서양을 통한 미동부와 유럽의 교역통로에 자리 잡고 있어 해적 입장에서는 치고 빠지기에 좋은 위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는 훗날 열강들이 쿠바 쟁탈전에 참여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서인도제도>


‘제도諸島’ 답게 12,000여 개의 많은 섬들이 모여있는 서인도제도 중에서 면적은 쿠바가 제일 크다. 그 다음으로 쿠바 오른쪽에 있는 '이스파니올라'섬. 이 섬의 왼쪽 1/3은 아이티, 오른쪽 2/3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 중 아이티는 퀴즈문제에 써먹기 좋은 특징을 갖고 있다. 바로 남아메리카에서 프랑스가 유일하게 통치했던 식민지이자, 세계사에서 유일하게 흑인 노예들의 혁명이 성공한 나라.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노예출신 투생 루베르튀르의 지도하에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결국 1804년 1월 1일, 나라이름을 '아이티 Haiti'로 정하고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아메리카대륙에서 미국(1783년)에 이어 두 번째, 남아메리카에서는 최초의 독립국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2010년 일어난 '아이티 대지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지도 모른다. 지구 최빈국에서 발생한, 당시 진도 7 규모의 지진으로 수도 포르토프랭스가 완전히 초토화됐다. 사상자가 60만 명 이재민이 100만 명에 육박했다. 우리나라도 구조대를 급파해 구호활동을 펼쳤는데 아이티의 구호 전달체계가 잘 이뤄지지 않아 당시 안타까운 뉴스가 많이 전해지기도 했었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이스파니올라섬 동쪽에 있는 나라로 1800년대 중반 아이티로부터 독립했다. 사실 내 경우 도미니카 공화국 하면 어릴 적 우표 수집하던 때가 생각난다. 당시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면 그 안에 세계 각국 우표들이 들어 있었는데 그중에 도미니카 공화국 우표가 많았던 것이 기억난다.


우체국 소인이 직접 손으로 찍은 게 아니라 이미 인쇄되어 흉내만 낸, 지금 생각해 보면 짝퉁 우표들이었던 것 같다. 르완다, 피지, 이름 모를 남태평양 섬나라 등, 아마도 저작권 문제가 생기지 않을 나라들만 골라서 우표를 넣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 외에도 서인도제도에는 우리가 한두 번쯤 들어봤을 섬나라들이 많이 모여있다. 국방, 외교, 통화를 제외한 내정을 이양받아 미국 자치령이 된 푸에르토리코도 있고, 인구가 140만 밖에 안되지만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의 드와이트 요크 등 유명한 축구선수들을 배출한 영연방 트리니다드 토바고도 있다.


옛날 ‘굼베이 댄스 밴드 Goombay Dance Band’라는 그룹이 불렀던 ‘선 오브 자메이카 Sun of Jamaica’에 나오는 섬 자메이카도 쿠바 바로 아래에 있다. 아주 어릴 적 이 노래의 신나는 타악기 리듬을 들으면 환상적인 카리브해 풍경이 떠올랐던 기억이 난다. 왠지 이 섬에 가면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파란 바다와 하얀 백사장, 착하고 예쁜 여자, 뭐 그런 판타지가 펼쳐질 것 같았다. 이렇게 카리브해에는 동화처럼 멀고 먼 나라들이 ‘서인도제도’라는 황당한 이름으로 옹기종기 모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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