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테리아 Jan 28. 2022

운동회와 교무처

맞벌이 부부인 우리는 육아휴직이 끝나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했다.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못할 상황이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제 갓 돌이 지난 아이를 낯설어하는 선생님에게 맡기고 오는 것은 늘 마음속에 조그마한 생채기를 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걱정은 가끔 뉴스에 나오는 어린이집 선생님들의 학대. 물론 아주 극소수인 것은 알지만, 없지는 않기에 걱정이 되었다.      


처음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끔 어린이집으로 선생님들을 위한 간식을 보냈다. ‘혹시나 내 아이가 더 귀염을 받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 뒤로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하원을 시키기 위해 어린이집에 방문하면 선생님들이 우리 아이를 좀 더 이뻐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 눈에, ‘우리 엄마는 언제 오나?’라는 눈빛으로 날 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를 보고, ‘그래도 우리 아이가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아이는 아니구나.’라고 안심을 했다. 내 아이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니, 내 초등학교 운동회 때 그 아이의 눈빛이 떠올랐다.     


벌써 30년이 다 되어가는 기억이다. 이상하게도 이 기억은 사진처럼 내 머릿속에 또렷이 기억되어 떠올리려고 하면 길을 헤매지 않고 바로 찾을 수 있다.     


요즘 초등학교 운동회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닌 시절에 운동회를 하면 학부모들이 학교를 찾아왔다. 보통 친한 어머니들끼리 같이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김밥과 과일, 통닭 등 손에 음식 보따리를 바리바리 들고 오셨다. 그리고 학교 담벼락이나 나무 밑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운동회에서 우리가 하는 체육활동을 구경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100m 달리기나 계주, 박 터트리기 등 각종 체육활동을 하는 중간에 어머니가 계시는 자리로 와서 준비해온 음식을 먹고 쉬었다. 그래서 운동회는 늘 기다려지는 즐거운 날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이 운동회가 몇 학년 때인지는 모르겠다. 달리기를 끝내고, 점심시간이 되어 어머니가 계신 자리를 찾아오는데 우리 옆자리에 앉아있던 여자아이를 보았다. 그때 이 장면이 나는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내 또래였던 것 같은데, 그날 그 친구는 부모님이 못 오셨는지 할머니와 같이 있었다. 이미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돗자리 위에는 흰밥과 김치뿐이었다. 그 뒤에 어머니가 옆에 계신 할머니께 싸 온 음식을 같이 먹자고 권하셨는지 아니면 그렇게 각자 점심시간을 보냈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나랑 눈이 마주쳤을 때의 어디론가 숨고 싶어 했던 그 친구 눈빛은 기억난다. 어렸지만 감수성은 예민할 때였다. 평소에도 도시락 반찬이 별로이면 도시락 뚜껑을 여는 게 싫었던 나이였다. 운동회는 평소와는 다른 날이었다. 운동회는 소풍처럼 특별한 날이었다. 신나야 할 그날이 그 아이에게는 얼마나 싫었을까? 살아가면서 그날이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까? 내가 짐작하여 느낀 그 아이의 감정이 이상하게도 내 기억 속 어딘가에 방점을 남겼다.   

        

대학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등록금부터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등록금은 장학금과 학자금 대출로 융통하였지만, 생활비는 아르바이트로도 늘 아슬아슬했다. 머릿속엔 늘 통장 잔고가 주식 호가창을 보는 사람처럼 정확하게 있었고, 잔고와 지출은 팽팽한 줄다리기처럼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당겼다. 그러던 중 학교 공지에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200만원의 장학금이 지급된다는 것을 보았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기업인가 단체의 후원이었던 것 같다. 교무처에 가서 신청만 하면 되었다. 그 돈이면 몇 달 치의 아르바이트비였고, 몇 달 동안은 잔고가 줄다리기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서류를 준비하고 교무처 앞에 갔는데 갑자기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교무처에 과 후배가 근로장학생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후배에게 내 상황을 알리고 싶지 않았고 그 후배를 통해 알려질 게 싫었다. 주변을 서성였다. 얼마를 배회하다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당당하지 못한가로 자신을 질책하며 문을 열었다. 앞에 보이는 직원분에게 장학금을 신청하러 왔다고 했다. 그 말에 힐끗 나를 보고 신청서를 내미는데, 자격지심으로 거기에 있는 내가 싫었다. 가난은 죄가 아니고 혹 그렇다 할지라도 그건 온전한 내 죄는 아니었지만, 그 공간에서 나는 죄수와 간수처럼 그들과 구분되어 가난이라는 죄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얼마 뒤, 장학금을 받고 경제적 상황에 숨통이 트였다. 가뭄의 단비 같았다. 교무처 앞에서 머뭇거렸던 나 자신이 웃겼다. 그게 뭐라고. 그 당시 나는 군대도 다녀온 대학 졸업반이었다. 그러니까 그때의 나는 사회적으로 엄연한 어른이었다.  어른인 나도 부끄러웠는데 초등학생이었던 그 여자아이는 어땠을까?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그 아이를 보면서 내가 그 상황이 아닌 것에 안도했던 것 같다. 그 바라보는 자리가 바뀌고 나니 운동회 때의 그 아이의 감정이 그대로 내 것이 되었다.     


다행히 졸업 후에 상황이 좋아져 대학 때 어려웠던 이야기를 술자리에서, ‘내가 대학 때 말이야….’ 라는 무용담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자수성가를 한 사람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과거’를 추억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교무처 앞에서 서성이던 내 모습은 인생의 여러 단락 중 나름 잊지 않기 위해 색깔 펜으로 밑줄을 그어 둔 부분이다.      


모든 경험은 배움이고, 그 배움으로 한 인간의 삶과 내면이 단단해질 수 있다면 그 경험은 그 몫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30년 전의 그 아이는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이미 인생의 여러 단락에 밑줄을 그어 단단해졌을 것이다.      


이제 그 아이도 마흔의 언저리에 있을 나이가 되었다.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있을까? 그 아이와 나는 우주의 수많은 시간과 공간에서 딱 한 번 같은 점을 이었을 뿐, 다시 이으려 해도 붙일 수 없는 것을 안다.     

   

하지만 또 우연히 그 점을 이을 기회가 온다면, 그 시간은 내 아들의 초등학교 운동회 날이고, 장소는 우리 옆 돗자리였으면 한다. 그리고 듣고 싶은 말은,

“ 불고기 맛있어?, 엄마 운동회 때는 말이야….”

작가의 이전글 아버지라는 역할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