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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돌이 Jun 14. 2017

학생과 함께 소설 읽기

의도하지 않은 놀라움

올해에도 어쩌다보니 고3 담임이 되었고, 여전히 아이들과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동아리 활동 시간마저 대부분 자습을 해야하는 고3의 숙명도 아직 달라지진 않았네요. [현대문학탐구반]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긴 했지만, 실제로 현대 문학 작품을 읽으려고 신청한 학생은 고작 5명입니다. 나머지는 어쩌다보니 편성이 된 학생들이구요. 우스꽝스럽지만 저는 5명의 아이들과 함께 격주로 시와 소설을 읽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제가 재미있게 읽었거나 아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 위주로 순전히 제 개인의 취향대로 운영하고 있는데, 이게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습니다.


자발적으로 뭔가 읽는 게 좋아서 모인 이 다섯 명의 학생들의 공통점이라면, 한 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정말 조용하고 차분하다는 점일 겁니다. 대답도 바로 잘 하지 않고 목소리도 작은 데다 그저 씨익 웃곤 할 때가 대부분이거든요. 게다가 제가 수업을 들어가지 않는 반의 학생들만 모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제 수업을 듣는 애들은 저랑 함께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결론이라서 조금 서글프기도 했습니다(이과반 수업만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억지위로를 하긴 했습니다만. 흑흑...). 아마 잘은 모르겠지만 이 녀석들은 수업 시간엔 아마 거의 존재감이 없는 쪽이 아닐까 합니다. 크게 떠들지 않지만 잠은 곧잘 자기도 하는, 그런 평범한 대다수의 학생들처럼요.


그런데 얘네들하고 같이 뭔가를 읽는 게 참 재미있습니다. 지난 시간부터는 오히려 제가 더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짧긴 해도 글만 잔뜩 있는 종이를 받아든 녀석들이 눈빛을 빛내며 끝까지 읽어가고, 어설프나마 서로 이야기를 하며 각자의 생각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진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고3 학생들에게서 그런 여유(?)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첫 시간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이들은 적극적으로 작품을 감상할 줄 알았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입니다.


지금까지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 윤동주의 '서시', '별 헤는 밤', 맥스 슐만의 '사랑은 오류', 윤제림의 "그는 걸어서 온다" 중 여러편,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다룬 칼럼 등을 읽었고, 오늘은 황정은의 '상류엔 맹금류'를 같이 읽었습니다.


제가 인상깊게 읽었던 작품이어서 다른 날보다 더 많이 떠들어버렸는데, 사실 아이들에겐 조금 낯설거나 어렵지 않을까 걱정도 했었죠. 기우였습니다. 다들 잘 읽었고, 잘 이야기했으며, 오히려 재미있다고까지 말하더군요. 아이들이 자유롭게 적은 감상 후기를 올려볼까 합니다. 요즘 학생들이 책을 안읽는다고 걱정들이 많습니다. 저만 해도 수업시간에 책 좀 읽으라고 닥달하는 게 거의 습관이 될 지경이니까요. 그런데 어쩌면 얘네들에게 적절한 독서 안내가 부족했던 게 아닐까 하는 반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사가 된 이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좋은 교사란 좋은 안내자가 되는 것일테고 전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만 깨닫게 됩니다. 아이들의 감상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글만 보고 느껴지는 학생의 모습과 제가 덧붙인 학생의 모습을 비교해보시면 재미있으실 겁니다.



3OOXX 정OO

'상류엔 맹금류'를 읽고 느낀 점은 하층민의 삶이 쓸쓸하고 슬펐다는 것이다. 한 집안의 가장이 많이 아팠을 때와 매우 친했던 지인의 배신으로 큰 빚이 생겼을 때에도 아이들에게 부끄럼 없는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하여 역경을 이겨냈으나, 아버지의 몸은 여전히 아프고 빚은 아직 다 갚지도 못해서 제희의 누나들은 진학을 포기하고 그냥저냥 결혼해 살아갈 뿐이었다. 게다가 가족 사이에도 균열이 생기고 이런 분위기를 이겨내고자 수목원으로 놀러가지만 결국에는 자신들의 처지를 알게 되는 것을 보고, 격정적으로 슬프진 않지만 마음이 무거워지는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다고 생각한다.

순박하게 웃는 남학생입니다. 분명한 대답 대신 물끄러미 웃기를 잘하는지라, 발표를 잘 하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투박하게 툭툭 던지듯 이야기를 잘합니다.

3XOXO 지OO

제목 : 바쁠 땐 뛰어야 할까, 걸어야 할까

제희네 가족이 시장에서의 일로 한 번 무너진 이후에, 어쩌면 아버지의 투병이 시작된 그 이후에, 메마른 행복만 얼추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 보였다. 제희네 가족이 어떠한 행복의 부재 그리고 그 부재 속에서 화만 넘쳐흐르는 삶을 살게 된 것은 자신들의 모습 역시 행복이라 불릴 수 있음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보통 희망이라고 하는 감정들만 있다면, 또 어떤 상황도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그 사람은 어딜 가도 살아갈 수 있다. 죽은 듯이 건조하게 사는 것이나 이따금씩 감정이라는 것을 느끼는 붕 떠 있는 삶들로 숨은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제희네 가족은 '그저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사는 가족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들을 입양 기관에 잠시 맡기거나 어려워도 부모 밑에서 키우거나, 실은 둘 다 막막한 일들인데 그 둘 중에서도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그런 삶을 산다. 어찌됐건, '막막함'이라는 영역에서 그나마도 덜 극단적인 것을 택하는 삶을 산다. 그런 삶에서는 무얼 선택하든지 즐거울 수가 없는 것이다. 아이들을 맡겨야하나, 키워야하나 그 고민이 별 의미가 없게, 결론지어진 막막함을 살아간다. 그저 내 새끼들이니 키우겠다는 마음보다, 사랑이 있으니 그 사랑이 끝나지 않는 한 부모의 책임을 다 하겠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았다면 어땠을까. 입양, 아니 다른 나라 내가 말도 풍경도 모르는 곳으로 자식이 사라지는 것 뿐만 아니라 이렇게 저렇게 네가 죽는다해도 내가 너희들을 잊지 않겠다, 무소식을 희소식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저 무소식으로 받아들이며 너희의 부모가 '나'임을 기억하고 살겠다. 그런 마음으로 자식들을 입양보냈다면 또 어땠을까. 소설 속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제희의 심정을 상상해보았다. 소설의 컨셉 상 드러나지 않은 게 아니라 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을만큼 슬픔이 익숙해서 그래서 더욱 알기 어려운 제희의 모습이 그려진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여학생. 시나 소설보다 수필을 좋아하며 습작도 하는 중.

3XOOO 김OO

제희와 헤어지고 난 후, 제희와의 추억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을 연설하듯 나열하고 있다. 제희의 출생과정, 나들이 갔을 때의 사건, 제희의 부모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제희 아버지의 몸 상태 등등 제희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적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우스꽝스러운 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제희와 헤어진 것을 우스꽝스러운 일들로 채우려는 모습이 보였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제목부터 가족 구성원의 생김새까지 깊이 있게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제목이 왜 이렇게 지어졌는지, 나들이를 가는데 신분증은 왜 안가져왔는지, 짐은 또 왜 이렇게 많이 싸가는 건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내가 됐든, 내가 아는 지인이 됐든지간에 결혼 전에 꼭 다시 한 번 읽고 결혼식장에 들어서야겠단 생각이 자꾸 든다.

눈물이 많고 여린 여학생.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을 이야기하며 눈시울이 붉어진 적이 몇 번 있습니다.

3OOOX 이OO

'상류엔 맹금류'는 가득 차 있지만 허전한, 찝찝한 소설이다.

글의 전반부에는 제희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이야기는 그 가족이 지나온 역경으로부터 여운을 만들어, 글의 중후반부에 있는 수목원에서의 이야기를 꾸며준다.

수목원을 갔던 날의 불행은 제희와 그 부모에 의해 애써 행복으로 감춰지고 그 행복은 그날의 일을 거품 마냥 덮어버리지만, 거품으로 가득찬 그 날의 일은 찝찝함을 남겨두다가 결국 그 거품이 빠지며 들어나게 된다.

이 소설의 제목이자 거품을 빠지게 만든 한 마디인 '상류엔 맹금류(그 물은 똥물이에요)'는 나중에 화자가 이 날을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전형적인 남학생. 복잡한 것은 싫어하고 책과는 거리가 먼 학생일줄 알았습니다.

3XOXX  박OO

가족끼리 처음으로 하게 되는 여행 아닌 여행이지만, 그 여행은 기분 좋은 즐거움이 아닌 짜증스러움과 불편함의 연속이다. 발목을 다친 제희는 분위기를 전환해보려 애쓰지만 소용없다. 어쩌면 계속 투정을 부리는 가족의 모습은 제희에게 있어서 전쟁통을 겪은 가련한 여인, 아내와 자식을 위해 외딴 나라에서 불법체류를 하며 돈을 벌어야 했던 안쓰러운 남자를 회상하는 서술자에게, 숨기고 싶었던 모습은 아니었을까? 비탈을 헛디딘 제희의 어머니가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일 때 그 웃음 뒤에 가려진 아픔이 실제로도 그 가족에게 보이는 따스함 뒤에 숨어 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가장 조용한 학생.  아파서 조퇴하고, 언제나 졸음이 가득한, 그래서 매번 교무실에서 담임 선생님께 불려와서 혼나는 장면만 목격했던 학생입니다. 학교 다니기 싫어하고 매사 귀찮아하는 그런 학생일줄 알았는데 동아리 시간에 가장 많이 저를 놀라게 하는 학생입니다.

어떠신가요? 감상을 읽을 때의 느낌과 제가 말씀드린 학생의 모습이 잘 연결되십니까? 저는 그러지 못했고, 여전히 선입견을 가지는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학생들인지라 작품 내용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제대로 감상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좀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감상들을 제대로 이끌어야하는건 제가 할 일인데 게을러서 그 부분까지 미처 챙기지 못한 게 못내 아쉽긴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저 이런 이야기들을 학생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점만으로 조금 기뻐해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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