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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돌이 May 10. 2020

해마다 반복되는 처음

늘 새로운 자리

3월의 첫날이었다. 날씨 따위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거의 일주일 동안 그 날의 동선은 물론 말투까지 연습했다. 교무실에서 전달사항을 확인하는 동안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막상 교실문을 열고 들어서자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렸다. 서른 명 남짓되는 학생들이 어색한 침묵 속에서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비했던 첫인사는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그 적막함에 짓눌려 기계처럼 그 날의 일정을 주욱 읊고난 후 도망치듯 교실을 빠져나왔다. 긴장감과는 전혀 다른 낯선 감정 앞에서 나는 당혹스러웠다. 한 달이 채 지나기 전에 나는 그 날의 느낌을 설렘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가 된 지 3년째 되던 해, 그렇게 나는 첫 담임을 맡았다.

하지만 첫날의 설렘은 유통기한이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다. 비가 무척 많이 내리던 날, 교과서에 없던 강은교의 시 하나를 칠판에 적었다. 수업 안 하고 뭐하시냐는 아이들에게 “그냥. 비 오잖아.”라고 하며 윙크를 날렸고 교실에는 아우성이 피어올랐다. 그 날은 그저 비 이야기를 하고, 비가 나오는 시와 소설을 이야기하고 수업을 마쳤다. 나에게 국어 수업이란 늘 그렇게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얌전하던 학생이 어느 날 내게 힘내라며 수줍게 음료수와 응원의 쪽지를 건네던 것처럼 모든 학생들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좋아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날, 나와의 관계도 좋았고 수업에도 열심히 참여하던, 성적도 꽤 우수한 우리 반 학생이 나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내 수업을 들을 땐 재밌고 좋은데 그래서 뭘 공부했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당황스럽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졌고 꽤 오랫동안 그 아이의 말을 가슴에 담았다. 그때 고3 수업도 같이 하고 있어서 그런 고민은 더 깊어졌는데 우리 아내가 내 이야기를 듣고 넌지시 말해주었다.
“당신은 학생들이 당신처럼 문학을 좋아하기를 바라는 것 같아. 하지만 모든 학생들이 좋아할 필요는 없지 않아? 우선은 성적이 중요하잖아. 좋아하는 과목은 다른 것일 수도 있고.”
그 날 이후로 나는 모든 학생들이 국어를 좋아할 필요는 없다는 걸 전제로 수업을 준비했다. 내 입장에선 굉장히 서글프게도, 많은 학생들이 그런 수업을 더 좋아했다.

수업의 고민과 함께 우리 반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예상과 다르게 전개되기 시작했고 나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학생부에 붙잡힌 녀석과 입씨름을 했고 여학생들의 신경전에서 지쳐가는 아이를 살펴봐야 했으며 옆 반 학생들의 입에서 우리 반 녀석들의 불만을 전해 들어야 했다. 나는 학생들의 의견에 귀 기울인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반 아이들은 나를 강압적인 담임이라고 했다. 감정 표현을 자제했다고 생각했는데 학생들은 나를 ‘장단 맞추기 힘든 기분파’라고 불렀다. 교무실에서는 잔소리 하나에도 날카롭게 반응하는 학생에게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런 일들이 쌓여가자 담임이라는 책무를 넘어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회한마저 찾아왔다. 날카롭게 갈린 마음결은 학생들에게도 전해졌는지 더욱 마찰이 잦아졌다. 학생들은 별 일 아닌 일에도 툭툭거렸고 나는 웃어넘길 일임에도 점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난히 나에게 심하게 대들던 녀석이 저녁 무렵 문자를 보내왔다. 버릇없게 굴어서 죄송하다고, 요즘 좀 예민해져서 그런 것 같다며 내가 시킨 일은 내일까지 해오겠다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그 날 저녁 잠들기 전까지 나는 온갖 감정이 뒤얽혀 복잡한 상태가 되었다.

그 문자를 받은 이후 꽤 오랫동안, 나는 어떤 교사인지, 어떤 담임인지 곰곰이 되씹어보았다. 나는 좋은 담임이 되고 싶은 담임이었고, 좋은 교사가 되고 싶은 교사였다.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는 학생들을 좋아했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싫어했다. 나조차 그들에게 사랑받고 싶어 했으면서 내 스스로 그들을 온전히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 학생을 한 명의 온전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자꾸 내 기준으로 그들을 옭아매려고 했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 그런 교사를 싫어했으면서도 나는 좋은 교사라는 명목으로 그들을 구속하고 있었다. 학생의 잘못을 꾸짖다가 그 학생을 미워했다. 모든 학생이 교사를 좋아할 필요는 없다는 걸 깨닫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후로 십여 년이 흘렀다. 나는 오늘도 되묻는다. 나는 좋은 교사인가?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다만 학생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학생들을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랑에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의 사춘기와 연애와 결혼과 교사의 경험 모두를 합쳐 겨우 조금 알게 되었다. 복도에서 어깨를 툭 치며 “쌤, 하이~”하고 지나가는 녀석과 수업 시간 내내 딴짓만 하는 녀석과 유독 나를 미워하는 녀석도 결국 모두 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이라는 사실만큼은 정확히 알게 되었다. 여전히 잘못한 학생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그 학생을 미워하지 않는다.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혼내야 하고 잘한 건 잘했다고 칭찬하는 게 교사의 책무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반이 아니었음에도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다시 연락해온 제자가 내 서투름을 열정으로 기억해주는 것도, 우리 반이었지만 내가 싫어서 제자들과의 술자리에 나오지 않는 학생을 알게 된 것도 모두 내가 교사이기 때문에 겪는 일이다. 슬픔과 기쁨의 파도 속에서 나는 오늘도 내일의 수업을 준비한다. 학생들의 진심을 믿는다. 그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알게 되었으며, 단 한  사람의 신뢰만 있어도 아이들은 비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매년 새로운 학생들을 만나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교사가 된 지는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늘 새로운 학생을 만나고, 그 학생들에게 나는 언제나 ‘처음 만나는 국어 선생님’이니까.

수업 시간에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내가 너희들 나이였을 때 나는 우리나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그래서 어른이 되면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더 나은 사회를 만드리라 다짐했었노라고. 그런데 그렇게 많이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변화를 믿는다. 나와 함께한 학생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성장할 것이며 그 힘을 믿는다. 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오늘도 나를 학생들 앞에 서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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