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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모츄 Mar 13. 2024

징계조차 감사한

시편 51 : 1~19

"주의 신실하신 사랑으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크신 자비로 내 죄과를 지워 주소서.

내 모든 죄악을 씻어 주시고 내 죄를 없애 나를 깨끗이 하소서...

내가 범죄자들에게 주의 길을 가르칠 것이니 죄인들이 주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시51:1,2,13)


본 시편은 다윗의 참회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다윗은 본인이 죽을 죄를 지었다고 고백한다(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시51:14). 구약의 법령에 의하면 생명을 고의로 해한 자는 죽음으로 그 죄값을 치러야 한다(출21:12~17). 다윗은 자기 군사였던 우리아를 사지에 배치하도록 사령관에게 지시하여 간접교살했다. 그러니까 사실, 다윗이 율법을 준수하려 했다면 왕위가 문제가 아니라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그런데 그는 오늘 보듯이, 용서를 구하고 있다.


그가 하나님께 내 건 조항은 위에도 적어놓았다. "내가 범죄자들에게 주의 길을 가르칠 것이니 죄인들이 주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자기가 비록 죽을 죄를 지었지만 용서받을 수 있다면, 자기가 다른 죄인들에게 가서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설파하고 그들도 하나님 앞에 돌아오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범죄자는 경범죄는 아니고, 적어도 다윗과 비슷한 동류들 그러니까 죽을 죄를 지은 인간들인 셈이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동물의 제사보다 진실로 통회하는 마음의 회개를 더 원하시기에, 이렇게 기도드린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다윗이 어떤 동물을 얼마나 많이 잡아바쳐도 이 고의적 살인죄를 벗어날 수는 없다. 모세 때부터 율법에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다.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것 외에, 즉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기대하는 것 외엔 살아날 길이 없는 것이 다윗의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하나님께 내 건 조항은 일종의 'deal'이라기보다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처절한 외침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다윗은 자신이 뼛속까지 죄인임을 고한다. 죄인인 사람에게서 잉태되어 죄인으로 태어났고, 죄인으로 살다가 마침내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도 자신이 죄인인 것과, 자신이 지은 죄들을 다 알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용서 구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51편은 자기 회개의 고백을 수반한, 바랄 수 없는 용서를 바라는 희망이 깃든 탄원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용서하시면 깨끗케 되리란 걸, 다시 관계가 회복되리란 걸 믿고 있다. 그의 시는 용서와 회복을 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기쁨과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미래를 꿈꾸며 마무리된다(51:6~12,19).


나 역시 뼛속까지 죄인이며, 내가 죄인인 것과, 내가 지은 죄들을 다 알고 있다. 부지 중에 지은 죄도 있을텐데 어찌 아느냐 묻지는 말자, 유치하게. 부지 중에 지은 죄가 없더라도 나의 죄는 태산과 같고 엄중하기는 다윗에 버금간다. 다윗의 성령의 사람, 기름부음 받은 구원의 백성이자 왕이었음에도 이러한 끔찍한 죄를 저질렀듯이 나 역시 회심한 이후 저지른 죄들이 많다. 부지 중에 지은 것들도 아니다. 고의로 그러한 것들이 상당하다. 


회심하고 나서 한동안은 더이상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을 줄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다윗의 못난 행동들은 구약시대라서, 성령께서 신자 안에 내주하시기 전의 시대라서 그런거라 해석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에 기록된 성령께선 우리의 자유의지를 꺽어서라도 자기 백성의 성결 유지하시는 분이 아니다. 베드로의 못난 짓은 오순절 성령세례 이후에도 드러난다. 다메섹에서 구원을 경험한 바울은 자기 멘토와 같았던 바나바와 크게 싸우고 헤어진 적도 있다. 아니, 그런 사소해 보이는 문제들은 접어두자. 바울이 보낸 숱한 서신을 보라. 구원이 임한 각 지역 교회공동체에 어떠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적혀있지 않은가. 그들은 모두 예수를 이미 믿고 있는 이들이다.


율법을 보면, 세상의 인과율을 보면, 다윗의 간구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다윗의 행동은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더 높고 놀라우신 하나님께 기대하는 용기있고 지혜로운 행동이다. 그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율법보다 더 큰 권한이 있으신 유일한 분임을 알고 그분에게 율법으로 따지면 결코 받을 수 없는 용서를 간청했다! 그리고 우리가 아다시피, 비록 그를 향한 하나님의 표징적인 징계가 뒤따랐을지라도 용서를 받았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삼하12:13~15)


그의 죄의 산물로 얻은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을 하나님이 거두어 가셨다. 그러나 하나님을 잃지 않았다. 하나님 입장에선 손해보는 장사다. 사실 다윗에게 한번 더 기회를 준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다윗이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비방거리를 선사한 것이기 때문이다(욥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자랑거리였다). 밧세바와 다윗이 자식의 죽음 앞에서 어떤 심정, 무엇을 느끼고 깨달았을지는 섣불리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무언가 깨닫고, 무언가 느끼고, 무언가 뉘우쳤으리라는 것은 조심스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나의 꼴을 보면서 무언가 깨닫고, 무언가 느끼고, 무언가 뉘우쳤다. 그러나 여전히 연약한 죄인이다.


여전히 나는 용서를 구할 수 밖에 없는, 율법으로 보면 여전히 구제불능인 죄인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초월적 은혜를 바랬듯이, 나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하는 특별한 은혜에 기대지 않고서는 죽음 뿐인 죄인이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닌, 단정적으로 죄인이며 죄이며 죽음 외엔 공의롭다할 판결이 없는 상태. 그런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대신 지고 죽어주심으로,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희생을 제물로 받으사 용서해 주시고 그 증거로 부활케 하심으로, 그 사건이 내게 만유 위에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가 되었다.


내 손에 남은 내 죄의 산물은 무엇이 있으려나. 혹은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그저 오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말씀을 읽을 수 있으니 감사할 뿐이다. 이미 지나간 일들, 내 힘으로는 되갚을 수 없는 일들,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 그런 불가항력적인 것들에 묶여 오늘을 바르게 살기 주저한다면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한다. 나단이 오면 오는대로, 성령이 알리시면 듣는대로, 징계가 임하면 기꺼이 받으면서, 징계조차 나를 향하신 사랑의 일부임을 되새기며 감사의 제사를 드리기를 소망해 본다. 그리고 오늘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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