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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모츄 Apr 05. 2024

요압이 베드로 되기까지

열왕기상 2:1~12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그의 백발이 피 가운데 스올에 내려가게 하라"


아들 솔로몬을 앞에 두고 다윗이 두가지 유언을 한다. 하나는 하나님 잘 믿으라는 소리고, 하나는 두 명을 죽이고 한 명을 잘 봐주라는 소리다. 아들보고 대신 좀 죽이라는 사람은 장군 요압과 게라의 아들 시므이다. 한 명은 자기 말을 안 듣고 멋대로 사람들을 죽였고, 한 명은 힘들고 어려운 때에 나타나 다윗을 욕하고 저주한 인간이다. 잘 좀 봐주라는 사람은 바르실래의 아들들이다. 바르실래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쫓겨내려갈 때 그를 환대하고 섬긴 사람인데(삼하17장), 그의 아들들을 왕과 같은 상에서 먹게 하라는 것은 그들을 신하로 등용하라는 소리다.


다윗이 요압장군이 죽인 사람으로 언급한 인물은 두 명인데, 아브넬과 아마사라는 사람이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사울왕이 죽으면서 나라는 다윗이 다스리는 유다 지파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다스리는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로 나뉘는 양상이었다(삼상2장). 나중엔 다윗이 이를 통합하여 통일국가로 존속이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사울가문의 이스라엘을 섬기는 대장군 아브넬이 다윗에게 항복과 충성을 맹세하여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대장군 아브넬은 예전에 요압과 앙숙인 관계였다. 두 나라가 한창 싸울 때, 요압장군의 동생 아사헬이 퇴격하는 아브넬을 집요하게 추적하다 결국 그의 손에 죽었던 과거가 있다(삼하2장). 그 앙갚음으로, 다윗이 아브넬을 통일왕국에서도 기용하려고 했음을 알면서도 독단으로 살해한 것이다.


요압이 장군 아마사를 죽인 것도 보복성이다. 장군 아마사는 다윗의 혈족으로 젊은 장수였다. 그는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킬 때 압살롬의 편에서 군대장관직을 맡은 자다. 압살롬이 패하고 아마사도 당연히 죽을 운명인데 이를 다윗이 살려줬다. 살려준 정도가 아니라 차기 군대장관직을 맡기노라 공포했다. 뿐만 아니라 반란도당이 생겨나자 실제로 요압을 제쳐두고 아마사를 불러 이를 제압하라고 명한다. 현직 군대장관인 요압은 쫓겨가는 다윗을 모시면서 끝까지 보필한 노장이었고, 당시에도 두눈 퍼렇게 뜨고 살아있었다. 요압은 출정하는 와중에 아마사를 직접 살해한다(삼하20장).


왕에게 충성하지만 왕의 명령을 듣지 않는, 아이러니한 인물이 요압이다. 어쩌면 요압은 나를 닮아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사람 혹은 하나님이 내게 좋은 것을 줄 때, 내 마음에 들 때는 칭송하고 좋아하다가도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차갑게 혹은 무섭게 변해 버리는 모습. 나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걸 드러내는 성격이냐 아니냐의 차이가 좀 있을 뿐... 요압처럼 살지 말아야지 하는 반면교사로만 끝내기엔, 인간이 그렇게 강인한 존재가 아님을 상기하게 된다. 그게 어디 맘처럼 되는 일이던가? 요압도 그렇게 살고 싶지만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너무 탓하거나 악마화 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본다. 그도 사람, 나도 사람. 그렇다.


아브넬도 요압도 왕보다 힘이 셌다. 사울왕의 아들을 섬기던 아브넬은, 그 왕에게 책망을 듣자 열이 받아 다윗에게 나라를 바쳐 투항하기로 결정할만큼 권력이 셌다. 요압 역시 다윗이 꼼짝을 못했다. 아브넬을 죽였을 때도 그를 징계하지 못했고, 아마사를 죽였을 때도 그를 징계하지 못했다. 자기가 죽을까봐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그가 여전히 나라에 필요한 존재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요압이 죽인 것은 모두 차권자들 즉 자신을 대신할만한 사람들 뿐이다. 그들이 죽으니 요압의 자리는 어쩔 수 없이라도 보존될 수 밖에 없었겠지.


나도 한때 요압의 자리에 섰던 선명한 기억이 있다. 내가 쥔 칼을 휘두르며 상위 리더십들에게 강하게 반발하고 저항했다. 사실 그건 저항이 아니라 '요구성 짖음'에 가까웠다. 그들을 조종하려는 시도였고 그 내면엔 '내 뜻대로 해'라는 강한 욕구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나는 그 당시 그걸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도 잘못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틀린 것이 내가 옳다는 증거는 될 수 없는 것인데, 그걸 몰랐다. 어리석었다. 내가 그들보다 깨끗하고 청결하고 사리분멸 잘하고 하나님 사랑하는 줄로만 알았지. 다행히 그런 내 추악함을 깨닫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몇년이나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지X발광을 하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몇 년 안에 알게 된 것만도 감사하다.


교회를 여전히 나가지 못하는 이유가 그 연장선에 있나 싶기도 하다. 내가 원하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면 가기 싫다는 건데, 내가 원하는 교회의 모습이란 결국 내 뜻대로 빌드업되어진 교회라는 말과 동일한 것 아닌가 한다. 목사도 내가 듣기 좋은 말만 하고, 내 성향과 기질과 가치관에 부합하는 설교만 하고, 교우들도 나를 잘 이해하고 사랑해 주고 때론 칭송도 해 주는 그런 곳을 바라고 있었던 건가? 내가 삐죽이거나 반발하거나 힘들어 할 때는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기다리고 이해해주고, 혹시라도 작은 것 하나 용기내어 할 때는 아기의 걸음마를 기뻐하는 부모처럼 즐거워해 주기를 바라는... 그런 건가? 쓰면서 정리하다보니 다행히 거기도 아닌 듯 하다(그러나 그런 시절도 있었음은 분명하다. 떠오르는 것들이 있는 보면 말이다). 


그러면 지금은? 여전한 나의 성향이 그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안 입어도 되는 피해를 줄까봐 못 나가겠다. 기복신앙 설교 좀 하면 어때, 한 귀로 흘리면 되지. 무식하게 자기 자랑 좀 하면 어때, 잘났나보다 하면 되지. 교제모임에서 자기들끼리 시기 질투 좀 하면 어때, 사람은 다 다르고 성숙은 나이순이 아니라고 속으로 되새기면 되지. 그게 안되는 나의 성정을 내가 알기에, 게다가 예전처럼 싸우기엔 힘빠졌고 계속 그대로 보고있기엔 아직 괴롭고, 저러다 큰일나겠다 싶은 걱정은 여전하다보니, 차라리 보는게 나을 같아 여전히 주일마다 책상 앞에 머문다.


매주마다, 교회 잘 다니는 아이에게 유언하는 다윗처럼 비장하게 잔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속으로 꿀꺽 꿀꺽 삼키고 말을 돌리며 어떻게든 참아내는 게 지금의 역량의 전부인 듯 싶다. 그 세월을 겪고 기껏 성숙했다는 게 아뭇소리 안 하는 정도라니.. 인간은 참 가엽고 하찮은 존재인 듯 하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살펴보시며 용서하실만 하다.


하나님이 가엽고 하찮아서 불쌍히 여기신다고 하면, 나의 하찮고 속되고 얕음도 복되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수 있으니 말이다. 지혜자나 부자나 악인이나 필부나 다 결국 헤벨의 인생을 살텐데, 자신의 하찮음을 알고, 그것으로 방패삼는게 아니라 은혜에 감사하는 겸손을 가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지혜롭고 기쁘게 살 방법은 없으리라 생각이 든다. 


언제쯤일까. 다른 이들을 위해 섬기며 수고하고 기대와 소망을 품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요압같은 자리와 시간들을 통과하여 여기, 온갖 힘이 빠진 갈릴리의 한 어부처럼 되어 말씀을 주시는 주님 앞에 앉아있지만, 아직도 이 모닥불 앞에서 예수와 함께 있을 뿐 일어설 시간은 되지 않은 듯 하다. 그래도 많이 왔다. 그렇게 믿는다. 물론 아직 한참 남았다. 그래도 많이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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