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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모츄 Sep 26. 2024

사랑해야 할 수 있는

열왕기하13:14~25

엘리사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선지자 중 하나다. 당시 나라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둘 다 진상이긴 했지만 북이스라엘 왕국이 좀더 신앙적으로 진상 짓을 많이 했었다. 엘리사는 북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활동한 선지자다. 그는 타락한 왕정을 향해 회개를 촉구하는 한편, 이스라엘 침범·위협하는 주변국들을 향해 함께 싸웠다. 일례로, 아람(aram)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급습하려다 번번히 실패하자, 밀정이 있나 의심했지만 엘리사의 예지력에 의한 방해였음을 알게 된다. 이에 왕은 엘리사를 죽이러 그가 사는 성을 군대로 포위한다. 엘리사는 태연했는데, 그의 종이 영의 눈을 떠서 보니 불말과 불병거(horses and chariots of fire/NIV)가 아람군대보다 훨씬 많은 숫자로 역포위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군사들의 눈을 일시적으로 멀게 해 집에 돌아가도록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왕하6장).


오늘 본문은 그런 그가 임종을 앞둔 장면이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이던 요아스가 늙은 선지자에게 문안을 온다. 그리고 이렇게 부른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전차와 기마병이여!(My father! My father! The chariots and horsemen of Israel!)” 일찌기 불말과 불병거 환상을 보여주며 신비한 사건으로 군대를 물리친 적이 있는 엘리사에게 어울리는 찬사다. 


늙은 선지자는 왕에게 활과 화살을 가져오라고 한 뒤, 왕에게 활을 잡으라고 시킨다. 활을 잡은 왕의 손에 선지자의 손이 포개졌다. 그 손이 얹어진 채로 동쪽 창을 열으라 시킨 뒤, 창밖을 향해 활을 쏘라고 한다. 왕이 활을 쏘자 엘리사는 자기가 시킨 일들의 의미를 알려준다. “여호와의 구원의 화살입니다. 아람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화살입니다. 왕은 아벡에서 아람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킬 것입니다.(왕하13:17/우리말)”


이번엔 화살을 집어들고 바닥을 내리치라고 한다. 이쯤되면 어지간한 바보가 아닌 이상, 화살로 바닥을 치라는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람을 공격하라는 의미라고 연관시킬 것이다. 방금 쏜 화살을 일컬어 '하나님의 구원의 화살'이라고 설명해줬는데 이걸 연결 못시킨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자기 나라를 침범하는 원수, 적대국가, 오랜 세월 이어온 악연이 살아있는 국가. 그걸 칠 절호의 기회가 눈 앞에 왔는데 이 왕이 어떻게 했는지 보라.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말했습니다. "땅을 치십시오.” 그러자 그가 세 번 내리치고 멈추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그에게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대여섯 번 쳤어야 아람 사람들을 완전히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왕이 아람을 세 번밖에 못 칠 것입니다.”(왕하13:18~19/우리말)


짐작하기로 요아스는 아람을 공격하기 싫었거나, 그런 활동에 관여할 마음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요아스 가 어떤 왕인지 궁금해 진다. 사실 오늘 본문의 바로 윗 문단에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기술되어 있다. 

"요아스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저질렀고, 이스라엘 백성을 죄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따르며 계속 그 죄들을 저질렀습니다."(왕하13:11/우리말) 


아 이런... 시시한 진상 놈이었다. 그저 존경받는 국가적 선지자의 임종 전 문안을 왔을 뿐인데, 너무 엄청난 예언을 하려고 하니까 적당히 무마시킨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실제 그렇게 생각하는 신학자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이어지는 본문의 내용은, 이후에 정말로 요아스가 3번의 승리를 거머쥐었으나 아람은 여전히 존속되었음을 알리며 끝을 맺는다.


악하고 진상 짓하는 자가 왕위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능력을 아끼려 하시지 않는다. 언제든 어떻게든 기회와 도움을 주시려고 한다. 그러나 진상은 자기가 진상인 줄 모른다. 자기가 해야 할 일과, 나중에 칭찬받을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기 뜻대로 산다.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요리사가 뜻대로 산다는 것은 요리를 하면서 뜻대로 사는 것이다. 선생이 뜻대로 산다는 것은 가르치면서 뜻대로 산다는 것이다. 선생이 된 자가 가르치기 싫다며 자기에게도 자유가 있다는 말을 주장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러려면 선생자리에서 내려오면 된다. 가게 문을 열었으면 음식을 만드는 것이 성실함이고 선생이 되었으면 강의를 하는 것이 성실함이다.


마찬가지로, 신정국가였던 이스라엘의 왕이면 왕답게 살면서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자들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따라 이미 왕된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이자 그분의 소유된 고귀한 보물된 신분이 됐다(벧전2:9). 요아스 왕 보고 한심하다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구나. 이거... 내 문제네.


내가 악한 짓, 진상 짓을 하려고 할 때도 하나님은 하나님 노릇을 하셨다. 지금도 그렇다. 여전히 그러하다는 의미다. 베드로에 의하면 신자가 구원의 도를 경험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은 아래와 같다. 


"여러분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분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분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의 덕을 선포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벧전2:9/우리말)


이 구절에 의지하자면, 신자가 경험한 구원의 도는 '사람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사건'이다. 베드로의 말에 절대 동감한다. 내가 어둠임을 깨달은 것과, 그분의 놀라운 빛을 감지한 것은 동일한 시간에 벌어진 일이다. 그분을 느낀 순간 말할 수 없는 밝음을 인식했고, 동시에 나의 현재가 얼마나 어두운 상태였는지 인식할 수 있었다. 마치 태어나서 한번도 빛을 본 적이 없던 심해동물이 해수면 바로 위에서 온기와 밝음을 인식한 것과도 같았다.


체험을 뛰어넘는 이해는 없다. 무당이 작두를 탈 때 이를 물리학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방법이 없다. 무당의 현실은 이론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므로, 과학이 지배하는 세상에선 이성에 의해서 비판받아 지워져야만 한다. 하지만 그녀의 발끝은 능히 작두를 견딘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갈릴레오의 고백은,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체험의 영역에 선 종교인들의 경계 안에서도 일어나는 고백이다. 너희가 뭐라고 하든 내가 겪은 체험은 부정될만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아까 '악하고 진상 짓하는 자가 왕위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능력을 아끼려 하시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오늘 구약 본문에 나오는 사건을 토대로 쓴 문장이다. 그런데 이젠 로마서의 구절도 떠오른다. 같은 맥락의 말처럼 느껴져서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롬5:8/우리말)


이런 구절을 보면,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 개념이 사람들에 의해 점차적으로 첨가되고 변형된 형태의 존재라는 어떤 주장보다, 이전 시대에 드러나고 인식되었던 것보다 신약의 시대(후대)에 드러나고 이해하게 된 하나님의 모습이 보다 폭넓게 밝혀진 것 뿐이라는 생각에 기울게 된다. 여기서 종교의 부작용에 대해선 논할 필요가 없다. 예수가 등장할 당시의 교회 모습은 헤롯성전으로 대표할 수 있는, 불합리하고 정치적이고 비리와 부정으로 얼룩진 상태 그 자체였다. 성전을 엎으신 예수의 일화가 곳곳에서 발견되지 않나. 


돌아보면 태초부터 지금껏 언제나 개혁이 필요하지 않을 때가 없었고, 언제나 문제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오래전 지인이 말한 게 떠오른다. "야, 세상은 언제나 과도기야." 맞다. 정반합이 윤회하듯 생성되며 새로운 시대에 대한 문제와 해답과 질문이 반복되는 것이 세상이다. 그 증거가 철학사조의 흐름에 드러나있고, 신학사조의 흐름에도 드러나있고, 교회 안에 새로운 집단과 종파, 교단이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사도바울이 주장하고, 베드로가 해석한 그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게 구원의 도를 맛보게 된 신자가 추구해야 할 삶이자 목적이다. 모든 신자의 1차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생의 목적과 사명은 '사람을 사랑하는 삶'이며 '그 이유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요아스는 전쟁에서 3번이나 이겼어도 기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 때문에 기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바닥을 건성으로 내리친 까닭이 조금은 이해된다. 하나도 신나지 않고 즐겁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기 생과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었기에. 자기 관심과 아무 이해가 상충하지 않는 일이었기에. 구약성경이 말하는 악한 왕은 백성들 밥을 굶긴 왕이 아니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본인도 하나님을 멀리할 뿐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백성들이 멀어지도록 조장한 인간들에게 붙힌 수식어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진상이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므로, 결국 시늉만 내다가 자기 인생을 살다 가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왕인데도.


사랑하자. 사람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자.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유일한 것이며, 우리가 진상 짓을 하고 있을 때부터 부어주신 사랑의 실체이자 목적이었다. 흔히 말세라고 한다. 시기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말들이 많다. 베드로의 말이 떠오른다. 이 말세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빛을 본 자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화살을 바닥에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치는 행위가 될 것들이 무엇인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서로 깊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벧전4:7/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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