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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un 04. 2023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68

가짜 행복을 위해 진짜 인생을 저버린 사람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까?

잃어버린 것은 그냥 잊어버리자.




지난해에는 왠지 모를 끝없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벗어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책과 영화에 빠지는 것이었고, 몰입하는 동안에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순간에는 왠지 안정되는 것 같았으니 아무 생각 없이 닥치는 대로 '읽고' '보았다'. 그렇게 본 영화 중에는 일본에서 실제로 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한 종이달이란 영화가 있었다.

'종이달은 종이로 만든 가짜 달이란 의미도 있지만 필름 카메라가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일본 사진관에서는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을 만들어 놓고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 사진을 찍으러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한 얼굴로 가족 혹은 연인과의 한 때를 사진으로 남겨 '한 때의 가장 행복한 추억'을 의미하는 뜻도 있다고 한다.'


어린 남자친구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해 화장품을 비싸게 주고 샀다. vs 내가 더 잘났다는 것을 어린 남자친구에게 과시하기 위해 화장품을 비싸게 주고 샀다.

어려움에 처한 타인을,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움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돈을 썼다.

자신이 가짜로 했다고 생각한 지난날의 선의가 현실임을 안 순간,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다.


자신의 상황이 조금 바뀌었고 마음이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그 시작은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하지만 그 끝은 엄청난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조금은 괜찮다고 생각해서 욕심을 내다보면 그 끝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것 같아, 깜깜한 터널 속을 걷던 시기에 개인적으로 마음을 다잡게 했던 영화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비록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사이 나의 상황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자신감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던 시기에, '종이달'이란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었다. 과거에는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사방에 CCTV가 지켜보는 현재의 은행에선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절망적일 때 본 영화는 무료함에서 시작된 주인공의 시도가 납득은 되지 않아도 이해는 되었지만 나의 상황이 달라지니 드라마는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각했다.

그 사이에 또다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지금 다시 그 드라마를 본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아침에 식빵을 구워 먹다 보니 문득 제주도에 와서 처음 한 달간 머무르던 게스트하우스에서 먹었던 조식이 떠올랐다. 갓 구운 토스트에 달걀 프라이와 슬라이스 치즈를 넣어서 만들어 먹었던 토스트는 정말 맛있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하면서 아침 일곱 시 반에 조식을 먹는 것이 점점 버거워졌다. 달걀 프라이와 김치찌개 속에 든 두부와 밥 두 숟가락이 점심의 전부였지만 난 그 한 끼로도 충분했는데 숙박요금에 포함된 조식이라며 꾸역꾸역 챙겨 먹고 있는 게 점점 싫어졌다.

그러다 매일 교체되는 공용 수건을 쓰면서 피부병이 생겼다. 목 주변으로 커다란 붉은 자국이 생겼는데 시간이 지나자 가려움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지만 사각형 모양의 두꺼운 흉터가 자리를 잡았다. 게다가 수시로 가려웠고 부어올랐다. 처음엔 물갈이를 하는 줄 알았지만 아무래도 공용으로 쓰는 수건 때문 같았다. 뽀송하게 마른 수건에서 냄새가 심하게 나는 날이 많아졌고 그래서 매번 직접 빨아서 젖은 수건을 쓰는 날이 늘어만 갔다. 내 수건을 따로 가져왔지만 매일 세탁해서 고온 건조기로 말리고 있는 그 수건을 남들도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었으니 유난 떨지 말자며 쓴 게 결국 문제가 되고 말았다.

이 문제는 게스트하우스가 달라진다고 나아질 상황이 아니었다. 한 달간 지켜보니 투숙객들은 지정된 곳에 수건을 반납하지 않았다. 사용한 수건을 화장실 바닥에 던져놓고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밤사이 축축한 곳에 방치된 수건들은 룸메이드가 올 즈음엔 이미 상태가 심각해져 있었다. 그런 수건들이 뒤섞인 채 세탁기에 빨았으니 고온의 건조기에 말려도 해결되지 않았던 셈이다. 어차피 수건을 빨아서 쓸 거라면 말릴 공간이라도 있는 게 나았다. 그래서 그 또한 나름의 이유가 되어 싱글룸으로 옮긴 거였다.

호텔로 옮기자 피곤한 아침에 억지로 조식을 먹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다시 1일 1식으로 돌아갔지만 점심 식사량도 예전과 차이 나지는 않았다. 긴장 상태에서는 적은 양으로도 버틸 수 있었다. 일요일에는 거의 굶다시피 했지만 배고프지 않았고 어쩌다 하는 군것질은 어느새 낙이 되어있었다. 퇴원하고 나니 밥이 또 아쉬웠지만 복직만 하면 해결되는 문제였으니 그 또한 잠시 거쳐가는 고민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생활 물품은 달랐다. 내 집이 없으면 언제 또 숙소를 옮겨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짐이 늘면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었다. 제주도 내에서 옮긴다면 방법이라도 있겠지만 만약에, 혹시라도 제주를 떠나야 하는 일이 생기는 경우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가야 했으니 더 신중해졌다. 그래서 지금까지 어느 정도의 불편은 감수하고 지내는 중이었다.

그중 아쉬운 것이 행거였다. 새로 사자니 아까워서 서울에 두고 온 행거가 생각나기도 했다. 퇴근하고 오면 그날 입은 옷들을 모두 빨아서 널었고 새 옷들을 가방에서 꺼내 입었다. 그렇게 넉 달쯤 불편하게 지냈지만 출퇴근할 때와 달리 오히려 퇴원하고 나니 아쉬움이 더 커져만 갔다.

어차피 복직할 거라면 호텔에서 계속 생활해야 했고, 그렇다면 호텔 라이프에 맞추어 편하게 지내기로 했다. 그래서 고민하고 고민하다 조립식 행거를 사 왔다. 가서 직접 보고도 당일에 바로 사 오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마침 그날은 재고를 확인했는데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몸이 불편한 나의 부탁으로 카운터 직원이 다른 직원을 호출했다. 하지만 그 직원이 물건을 잘못 가져왔고 결국 처음에 부탁한 직원이 창고에 가서 물건을 찾아오기에 이르렀다. 이런 직원을 만난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그 상황에서 이 행거는 반드시 사 와야 하는 물건이 되었고, 친절에 고마움을 전하며 선뜻 구입해 왔다.

그럼에도 바로 개봉하지는 못했다. 호텔에서 나가게 되는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행거는 이 호텔에서 지낼 때만 필요한 물품이었으니 이 호텔을 떠나면 쓸모가 없었다. 복직은 당연하다고 믿고 있었으니 호텔이 망하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을 거라 결론 내리며 드디어 개봉해서 조립했다. 외투며 자주 입는 옷 몇 벌을 정리해서 걸었더니 참 편했고 공간에도 잘 어울려서 너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몇 시간 뒤, 단체장의 면담 호출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긴장하고 가야 하는 거냐고 물었지만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그 면담이 퇴사를 권유하는 면담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다음 날 그곳으로 갔다.

형식적으로는 한 달간 퇴사가 유예되었다고는 하나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으니 그때부터 내 마음은 지옥이 시작되고 있었다. 절망적인 내 마음과 달리 단체장은 내가 머물고 있는 비즈니스호텔의 룸컨디션을 확인하고 싶다며 내 방을 보여달라고 했다.

제주도에 출장 올 때마다 숙소 구하기가 어려웠고 성수기가 다가오니 과도한 숙박비 부담에 고민 중이었던 모양이다. 처음엔 내가 집 대신 선택한 호텔 라이프를 이해하지 못하더니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는지 아님 거주와 출장은 다르다고 생각한 건지 나에게 호텔에 대해서 이것저것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적극 추천해 준 호텔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날은 퇴사를 권유받은 날이라 내 방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약속장소를 이곳으로 정하면 될 것을, 굳이 나를 그곳으로 오라고 했다. 게다가 면담이 끝나자 제주도민이었던 K까지 대동하고 당연한 듯 호텔에 따라왔다. 그래서 호텔 직원을 통해 비어있는 다른 룸을 보여주게 했다. 그들은 룸 컨디션을 확인하고 만족스럽다는 듯이 돌아갔다.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 행거가 눈에 들어왔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만족스러워하며 바라보던 행거였다. 어쩌면 제주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제는 그 행거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평소에는 만나지도 못했던 친절한 직원을, 그날따라 만났던 것은 결코 행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직원을 만나지 않았으면 그날 바로 구입하지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외출하기까지 시간이 또 걸렸을 테니 구입할 일은 전혀 없었을 텐데 싶었다. 어쩌면 조립을 하루만 더 미루었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다.

나는 고작 행거 하나 구입한 나에게 화풀이하고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호텔에서 지내는 동안, 부족한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내 생활은 오로지 '그곳'에서 일할 때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스타일도 습관도 심지어 생각도 모두 그곳에 맞추어져 있었다.

불만이라곤 고작 클린하우스까지 버리러 가야 하는 재활용 쓰레기 분리배출 정도였다. 서울은 격일로 배출하더라도 항목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버리겠다고 마음먹은 그날은 집안에 방치된 쓰레기를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 제주에서는 매일 분리배출해야 하는 재활용 쓰레기가 다르고 심지어 15시 이후에만 배출할 수 있었다. 그 시간 이전에는 수거함이 모두 가려져 있었고 청소차가 와서 전날 쌓인 쓰레기를 모두 수거하고 당일 배출 가능한 항목을 붙인 이후부터 쓰레기 배출이 가능했다.

[제주도 재활용 쓰레기 분리배출]
●플라스틱류 :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
●종이류 :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비닐류 : 목요일, 일요일
※ 종량제 봉투, 음식물 쓰레기, 캔 고철류, 병류, 스티로폼은 매일 배출 가능.

지금처럼 요일을 정해놓고 수거해 가더라도 항목별 배출할 수 있는 수거함이 비치되어 있었으면 싶었다. 플라스틱과 비닐의 구분이 난감할 때가 많았는데 그 또한 한꺼번에 배출하려면 일요일 오후 세시 이후에만 버리러 가야 했다. 종이와 비닐을 함께 버리기 위해서는 목요일에 가야 했다. 소량이라 할지라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버리러 가야 했으니 목발을 짚고 나가기에 조금 번거로웠다. 매일 배출할 수 있는 서울 아파트에 거주하는 직장인들은 일주일에 한 번도 힘들어서 집에 쌓아놓는 경우가 많은데 제주도 직장인들은 얼마나 번거로울까 싶었다. 일 할 때는 호텔에서 잠만 잤으니 쓰레기가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은 쉬면서 끼니까지 해결하고 으니 이것이 은근히 신경 쓰였다.

게다가 제주도 이마트는 박스에 담아서 배송해 주었는데 이 박스가 제일 문제였다. 서울이었다면 집 앞에 놔두어도 되고 박스만 따로 수거해 가는 동네 어르신들이 많았으니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박스조차 클린하우스에 갖다 버려야 하는데 재활용 쓰레기마다 배출 요일이 따로 지정되어 있고, 시간을 지켜야 했으니 외출할 때마다 맘대로 가져다 버릴 수가 없었다. 특히 다른 재활용 쓰레기는 가방에 담아서 가지고 갈 수 있었지만 목발을 짚은 상태에서 커다란 박스를 들고 가는 것은 은근히 힘들었다.

퇴원하고 지내는 동안 고작 재활용 쓰레기 분리배출이 유일한 고민거리였던 셈이다.




이제 그곳으로 돌아갈 마음은 전혀 없다. 일하던 직원이 그만 두든 말든, 직원을 구하기가 어렵다고 도와달라고 하든 말든 이제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여느 청년들처럼 그들은 더 좋은 기회가 생기면 당연한 듯 그곳을 떠날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그때가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싫어졌다. 내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그 어떠한 미련도 남지 않았다. 스스로 포기하기 위해, 그동안 그들이 나에게 저질렀던 애매한 일들을 다시 곱씹어보게 되었는데 그 기억은 내가 그곳을 포기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매장에 필요한 것이 있어도 사달라고 하기 힘들었지만 K는 아쉬운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본사 사무실 직원인 여자친구에게 요청했고 그 직원은 모든 것을 흔쾌히 조달해 주었다. 내가 보기에는 불필요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내가 일을 할 때, 밥을 유난히 많이 먹는 노숙자들로 인해 밥을 제때 조달하기 어려워서 밥솥 하나를 지원해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아침마다 대형 밥솥 두 개에 밥을 지었는데 첫 번째 밥솥 하나가 비면 두 번째 밥솥을 오픈함과 동시에 첫 번째 밥솥에 밥을 지었다. 그러나 첫 번째 밥솥의 밥이 다 되기도 전에 두 번째 밥솥이 비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렇게 밥이 떨어지는 순간이 오면 손님들은 밥이 채워질 때까지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마다 압력밥솥을 동원해서 밥을 충당하고 있었으니 그럴 때 쓸 비상용 밥솥 하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다른 지점에 비해서 손님 수가 많은 것이 아니었다. 1인당 소비하는 밥의 양이 많았을 뿐이라 조심스레 밥솥 지원 여부를 물어보았다. 물론 단체톡이 불편한 점장의 요구로 내가 대신 톡을 보낸 거였지만 그것이 본사 직원의 심기를 건드렸다. 역시나 손님도 없는 매장에 밥솥이 세 개씩이나 왜 필요하냐고 했다. 밥 소비 부분을 강조하며 설명을 했지만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밥이 부족해서 불편하다'는 말이 '바빠서 힘들다'는 말로 와전되어 나를 공격했고 그 일은 그 후로도 계속 언급되고 있었다.

특히 그 커플은 처음엔 30대 후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20대 초반이었고 요즘 말하는 MZ세대였다. 그 커플은 둘 다 초고도비만이라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워서 어쩌면 나도 순간 방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을 내 또래의 사고방식으로 판단했고, 설마 그렇게까지 할 거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떠나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다. 병원에서 자신을 다섯 살 아이와 같다고 했다던 주방 보조는 지금 어떤 상황인지 깨닫지 못했고 그저 주변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따르고 있었다. 점장은 자신이 원하는 왕국을 만들었으니 당분간은 꽤나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 같았다. 눈엣가시였던 나를 내쫓기 위해 잠시 눈감아주었던 그들의 일탈에 대해서 곧 지적이 시작될 테니 어쩌면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될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런 곳으로 내 발로 다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일은 벌어졌고 나에게도 조언해 줄 어른이 필요했다. 평소에 직설적인 말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는 이에게 용기 내어 연락했다.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따끔한 조언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의외의 답을 들었다.

무조건 납작 엎드렸어야지 처음부터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았던 거냐고 나를 나무랐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가서 사정해 보란다. 이미 결정된 일이라 더 이상 달라질 건 없다고 했더니, 요즘 같은 시기에 취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지 아느냐며 나에게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게 아닌데...

그때 나는 꼰대와 MZ 사이 그 어딘가에서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를 불태워서 이기려고 한 건 아니었다. 남들보다 대접받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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