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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마운틴 May 02. 2020

영화 남과 여 후기

어른도 때로는 남자와 여자이고 싶다

자폐증 아들을 키우는 엄마와 우울증 딸을 키우는 아빠, 북유럽 타국에서 우연히 만난 둘은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캠프장을 향해 동행하게 된다. 폭설이 내려 통행이 중지되고 결국 차를 세우고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아침이 되고 시리도록 추운 핀란드의 눈밭을 나란히 걷는다. 그러다가 몸을 녹이러 들어간 사우나의 온기에 취해 순간적으로 서로의 숨결을 공유하게 된다.

그렇게 짧고 강렬한 만남을 뒤로하고 그들은 각각 한국으로 돌아와 각자의 삶을 살던 어느 날, 기홍 (공유) 이 상민 (전도연) 을 찾아온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계속 만나고 연락을 이어가고... 둘은 그래서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서로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

상민은 어느 순간 자신이 너무나 기홍에게 심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그를 차갑게 대하기로 한다. '얘기가 하고 싶다'는 기홍에게 키스를 하며 '그냥 우리 섹스나 하자' 라며 '우리 사이에 얘기가 뭐가 필요하냐' 고, 감정 없이 그를 대하려 하고 결국에는 '우리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제일 좋을 때 끝내요' 라며 문자메시지로 이별을 고한다.

기홍은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만나서 얘기하자며 그녀를 찾아오고 마침 그때 상민의 아들 종화가 갑자기 실종되고 만다. 상민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아들이 사라지자 그녀는 이성을 잃고 아이를 찾아 헤매고 기홍은 그런 그녀를 묵묵히 따라나서고 결국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냇가에서 비를 맞으며 놀고 있는 아이를 찾아낸다. 아들의 행방을 몰라 상민이 가장 힘들었던 순간 그녀의 옆을 지켜주고 그녀와 아이를 위해 아이가 보고 싶다는 바다로 데려가 준 기홍. 이 사건을 계기로 상민의 마음은 기홍에게로 완전히 기울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상민은 다시 핀란드로 가고 (영화 속에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있지만 아마도 기홍을 만나기 위해 가는 것 같다) 거기서 아내와 딸과 함께 있는 기홍을 마주치게 된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만났을까?



이 영화는 커다란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볼거리가 많은 것도, 인물 간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도 아닌 두 주인공의 감정선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작품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와 아빠,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는 안정된 생활을 하는 두 사람이지만 사실은 가족이 버거울 때가 많다.

상민은 자폐를 앓고 있는 아들이 점점 커가면서 육체적인 힘으로는 아이를 케어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고, 기홍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아내와 역시 우울증이 있는 딸을 돌보고 케어하면서 지쳐가고 있었다. 비슷한 아픔을 지닌 남녀가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동질감에 이끌려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꽤 진부하지만 눈빛과 몸짓으로 전달되는 두 사람의 감정이 너무나 솔직하게 와 닿기에 관객은 영화 속 상황에 바로 몰입할 수 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힘든 일이지만 특히나 우리나라처럼 서로의 다름을 잘 인정하지 않는 문화권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 아픈 아이를 키운다는 건 더더욱 힘든 일일 것이다.

상민의 가정은 남편은 전문직에 종사하며 나름대로 그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고 아이 케어에도 적극적이며 아내 역시 아들을 돌보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위해 일을 하는, 겉보기에 상당히 바람직한 가정이다. 이에 비해 기홍의 가정은 기홍이 아픈 아내와 아이를 함께 돌보며 오롯이 고군분투하고 있어서 그가 기댈 곳이 없어 보인다.

두 주인공의 사랑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륜' 이고 따라서 영화 속에서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해피엔딩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이 없어도 아픈 아이를 돌볼 수 있는 배우자가 있는 쪽은 가정을 깰 수 있지만, 아픈 아이와 배우자를 보살펴야 하는 쪽은 결국 남겨질 가족의 불행을 막기 위해 가정을 유지한다. 물론 결말 자체가 '열린 결말' 의 가능성도 보여주지만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렇게 끝이 난다.

스토리 구조는 매우 전형적이지만 주인공의 감정선을 충실히 따라갈 수 있도록 한 연출과 두 배우의 탁월한 눈빛 연기, 감정연기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불륜을 소재로 한 보통의 영화라면 두 사람의 감정이 깊어지면서 각각의 배우자가 불륜사실을 눈치채고 그로 인해 갈등이 빚어지는 장면이 꼭 등장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내용조차 거의 없을 만큼 오로지 두 사람의 심적 변화에 포커스를 두었다.

어떤 리뷰에서 이 영화는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는 사람이라야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했던데 그 말이 딱 들어맞는 영화였다. 아이를 케어하느라 몸과 마음이 지친 남자와 여자, 그들도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사랑하고 사랑받고 이해하고 이해받고 싶은 순간이 있을 것인데 우리는 아빠와 엄마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를 당연히 여긴다.

부모가 아닌 남자와 여자로 살고 싶고 이해받고 사랑받고 싶은 순간이 올 때 자기 자신을 잘 달래줄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 때문에 불륜을 저지르는 게 당연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보며 상민과 기홍의 외로움과 아픔을 공감할 수 있었기에, 둘의 관계를 통해 남자와 여자로서 그들이 조금 더 성숙하고 행복해졌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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