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도 모른 죄
애라가 입사하고 3개월이 지나 수습 기간이 종료되었을 때쯤 '김즈'에는 유수의 기업에서 경력을 쌓은 어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검색 사이트에 버젓이 이름과 사진이 나올 정도로 유명한 사람도 있었다. 먼 훗날 애라는 '김즈'가 자신의 한 많은 스타트업 마케터 인생에서 가장 똑똑하고 고학력자를 많이 볼 수 있던 회사라 추억한다.
"2014년의 '김즈'는 진짜 성공할 수 있는 서비스였는데 전략이 잘못돼서 아쉽지."
종종 모여서 '김즈'의 짧은 리즈 시절을 회고하는 동료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평했다. '김즈'에서 탈주해 지금은 다들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가거나 창업을 하거나 어디 한 자리씩 맡은 걸 보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커리어에 실패는 '김즈' 뿐이었다. 애라는 8년 전에도 지금도 '김즈'가 어떤 가능성이 있었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대단한 동료들의 권능에 또 그런가 보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IT알못 애라가 스타트업에 인생을 걸면 안 되는 이유였을 것이다. 애라는 '김즈'를 사랑했지만 '김즈'에 대해서 잘 몰랐다. 사회 초년생인 그녀의 하루는 그저 김이사에게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뛰어다니는 게 다였다.
김 이사는 대표 김영화의 이란성쌍둥이다.
환영 회식 자리에서 김 이사의 본명이 김영원이라는 것을 듣고 애라는 그것 참 찰떡같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김 이사는 정말 영원히 ‘김즈’에 붙어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직급이 없는 수평 조직을 지향하는 여타 스타트업을 표방하고자 하던 ‘김즈’에서 김 이사는 유일하게 권위적이고 직급이 있는 사람이었다. 불행히도 '김즈'의 마케팅팀 중 콘텐츠 팀만 김 이사 직속 산하에 있었다. 콘텐츠 팀이라 해봤자 인원은 단둘, 애라와 김지경뿐인 신생 부서였다. 매번 김 이사가 물어온 허황된 일에 아이디어를 내야 했다.
"애라야~ 이 error야~ 너 기획안 대충 쓸래? 어제 보낸 거 3개 다 완전 error야. 하여간 옛말 틀린 거 없어. 사람은 이름 따라간다."
김지경은 기획안 달랑 세줄 써도 왜 이 '지경'이냐고 한 적 없으면서. 애라는 김 이사가 언제부터 지경만 편애하고 자신을 싫어했을까 곰곰이 떠올리려다 말았다. '어쩔 어쩔! 김영원 당신 인성은 이름 따라 0원이에요!' 김 이사의 다채로운 패악을 경험할 때마다 애라는 가족 회사는 인생에 여기가 마지막이라고 뼈에 새겼다. 빌런이 가족이면 퇴사를 안 한다.
"좋아해서 그런 거예요."
"네?"
애라가 당황한 사이 김지경이 하나 생긴 지하철 자리에 잽싸게 앉았다. 하루 종일 탈곡기처럼 김 이사에게 탈탈 털린 애라의 안쓰러운 몰골에도 김지경은 자리를 양보해줄 생각이 없다. 하지만 조언쯤은 선심 쓴다는 듯이 김지경이 애라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애라 님이 이사님 최애라고요. 마음에 들어서 수족처럼 부리고 싶은데 애라 님을 마음대로 가질 수 없으니까 심술 내는 거죠."
"전 납작 엎드려서 시키는 대로 다 하는데요."
"그럼 뭐해요. 티 나는데요. 김 이사 리스펙 안 하는 거."
지경의 말에 애라는 억울했다. 애라는 김 이사가 뭐라 하든 꼬박꼬박 웃었다. 살갑지 않은 건 무뚝뚝한 김지경이 훨씬 더 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저는 싸바싸바 잘해요."
뭐지, 저 자신감은? 하긴 김지경은 야무진 데가 있다. 적금만 종류별로 5개는 들고 있다. 야망도 넘쳐서 김 이사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항상 먼저 손을 들고 일을 받아간다. 결국 일이 몰리는 것은 어떻게든 피해 보려는 애라지만.
"그래서 최애라는 거예요. 계속 툴툴대지만 사실은 애라 님한테 일을 맡기고 싶은 거예요."
"왜요?"
"이래서 김 이사가 심술내지. 얄밉다니깐."
세 살이나 어린 게 콩만해가지고 학창 시절에 만났으면 저걸 쥐어박았을 텐데. 애라는 아쉬움에 쩝 하고 입을 닫았다.
"대표님이 애라 님 좋아한대요. 저번에 김 이사님이 저한테 말한 적 있어요."
"저 대표님 두 번밖에 본 적 없는데요?"
"재수 없어."
눈치도 정보통도 없는 애라는 몰랐을 테지만 김영화가 그녀를 예뻐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김지경이 재수 없어할 필요는 없었다. 김영화는 예뻐한다고 해서 호락호락 연봉을 올려주는 사람이 아니였다. 김 이사 역시 그랬다. 경주마가 어떤 대우를 받느냐는 꼭 얼마나 잘 뛰고, 좋은 기록을 내서 많은 상금을 받는지로 갈리는 것이 아니다. 그건 경주마의 노력이나 성적보다는 마주의 가치관에 달렸다. 어떤 마주의 소유로 있느냐에 따라 어떤 경주마는 버려지고 어떤 경주마는 끝까지 보호받는다. 애라는 분명 김영화와 김 이사가 쓰기 좋아하는 말이었다. 그들이 어떤 마주인 지는 아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